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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Magnum Opus: 호문쿨루스 정령사, 클로이의 이야기

님이여, 님에게 바치는 이 작은 생명을 힘껏 껴안아 주셔요. 이 작은 생명이 님의 품에서 으서진다 하여도 환희의 영지(靈地)에서 순정(殉情)한 생명의 파편은 최귀(最貴)한 보석이 되어서 조각조각이 적당히 이어져서 님의 가슴에 사랑의 휘장(徽章)을 걸겠습니다. — <생명(生命)>, 한용운(1879-1944, 한국의 시인)
일행은 여전히 파티의 이름을 짓지 못한 채 해드는강 근처를 배회중이었다.
— 투명드래곤파티 어때? 드래곤중에서도 졸라 짱 센 최강의 투명드래곤같잖아.
— 언제적 투명드래곤이야.
— 사랑이 넘치는 파티라는 의미에서 아모르파티는 어떤가요?
— 파티가 그 파티가 아닐 텐데.
— 우아하게 가볼까요? 엘레강스고져스소피스티케이티드애프터눈티파티요.
— 길어.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서로의 취향 차이만 확인하며, 일행은 지금 바다와 맞닿은 절벽 근처로 향하고 있다. 해드는강 세이렌 요리사 다다의 의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최근 바닷가 절벽 근처에서는 기이한 형태의 마물들이 일부 해드는강 주민들에게 목격되고 있었다. 머리가 없는 인간, 입가가 문어 촉수로 뒤덮인 말, 온몸에서 붉은 피를 흘리는 엔트, 이러한 마물들은 겉보기와 달리 행인을 공격해 오지는 않았고, 모두 출현한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바다로 스스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 아무리 봐도 마물이 나올 것 같은 곳은 아닌데… 그냥 어디에나 있을 법한 바닷가 절벽이잖아.
안젤리나는 주변을 스캔하며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사이에 루덴은 눈이 돌아서 주변에 널린 독초들에 눈이 돌아 있었다.
— 투구꽃—! 광대버섯—!! 원추리—!!! 헉, 디기탈리스까지!!! 이게 어떻게 다 여기에 있는 거지?
— 흠… 같은 장소에서 피는 게 이상한 풀들인가요?
— 응 물론이지. 원래 한 곳에서 같이 필 수가 없는 독초들이야. 원추리 같은 경우 햇빛이 잘 드는 산간 지대에서 자라는 반면에, 투구꽃이나 광대버섯은 습기가 많고 서늘한 음지에서 자라거든. 누가 일부러 한 곳에 심지 않는 이상 같은 곳에 자생할 수는 없어.
— 그럼 뭔가 확실히 이상한 곳이긴 하네요… 잠시만요.
휘———익—!
꺼누는 휘파람을 길게 불고는, 가지고 있던 나무 막대기를 높이 치켜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비 한 마리가 나뭇가지 위에 날아와 사뿐히 앉았다. 꺼누는 작은 목소리로 제비에게 속삭이더니, 제비는 ‘삣—!’ 하고 짧게 울고는, 다시 날아 올라 어디론가 향했다.
— 제비 말로는 오늘 아침에 한 마물이 절벽 아래 바다로 뛰어내린 이후로, 현재 근방에는 마물이 없다고 하네요. 대신 마물들이 계속해서 걸어나오는 수상한 오두막이 한 군데 있다면서 저희를 그 쪽으로 안내해주겠대요.
— 그 ‘삣’ 한 마디에… 그렇게 많은 말이 담겨 있는 거야…?
— 아뇨, 말로만 소통하는 동물은 거의 없어요. 수많은 움직임, 미세한 눈짓 같은 것을 종합해서 소통하는 거죠.
일행은 꺼누를 선두로 제비가 사라진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해안가 절벽을 따라 걷다보니 화창한 날인데도 거센 해풍이 불어와 루덴과 초코는 자주 중심을 잃고 기우뚱거렸다. 루나가 리라를 꺼내들어 노래를 부르려 했지만, 노래의 첫 소절만에 일행이 루나의 리라를 부여잡고는 그를 말렸다.
**
그렇게 한참을 걸은 뒤에야, 파티 일행은 수평선이 보이는 가장 높은 바닷가 절벽 근처에서 돌집 하나를 발견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민가처럼 보이지만, 주민들이 쉽게 오기 힘든 곳에 이런 평범한 집이 있다는 것만으로 대단히 수상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안젤리나가 돌집 안으로 가 손으로 문을 두드렸다.
— (똑똑) 저기요—! 계세요—?
그 동안 꺼누는 집 주변을 돌며 집안을 들여다 볼 창문이 있는지 살폈다. 그러던 중 문을 제외한 모든 곳에 창문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문득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이 집에서 밖으로 뚫려있는 곳이라고는 지금 파티 일행이 문을 두드리고 있는 현관문과 맨 위쪽의 굴뚝이었다. 꺼누는 잽싸게 뛰어올라 돌벽의 틈새를 잡고 능숙하게 지붕 위로 올라갔다. 지붕에 난 굴뚝으로 고개를 들이 밀자, 장작을 태운 뒤에 나는 매캐한 잔향이 올라왔다. 냄새가 꽤나 옅어진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분명 오늘 오전까지만해도 안에서 장작 난로를 태웠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분명 안에 사람이 없는 것으로 보였다.
— 안에 아무도 없어. 문 두드려봐야 소용 없을걸?
— 그런가요? 그럼 누군가 오기 전까지 잠시 기다렸다가…
끼—익
— 사람 말을 좀…
태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안젤리나는 이미 나무 손잡이를 돌리고 돌집의 대문을 열고 있었다. 안에서는 옅은 탄내와 함께 형용할 수 없는 달큰한 향이 풍겨져 나왔다. 겉보기에 아무런 특별할 것이 없는 가정집이었다. 거실에는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었고, 벽에는 장작이 검게 탄 벽난로가, 그리고 문이 반쯤 열린 침실 문틈 사이로 이불이 가지런히 개어져 있는 침대가 보였다. 분명 사람이 살던 흔적이 분명히 남아있음에도, 단지 햇빛이 드는 창문이 없다는 것만으로 일행은 모형집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 제비가 안내해준 장소가 여기가 맞지? 여기도 방금 스캔했을 때는 특별히 위험한 물건이나 생명체는 감지되지 않았어.
— 그러게요. 마물이 내뿜는 위압감 같은 것도 전혀 느껴지지가 않네요. 일반 가정집 같아요.
— 갑자기 집주인이 돌아와서 우리를 발견하면 주거침입으로 재판에 회부하는 거 아닐지.
— 그런 섬뜩한 소리를 잘도 하네요, 루덴.
모든 방을 샅샅이 뒤져봐도, 마물의 흔적같은 것은 조금도 나오지 않았다. 일행은 지쳐서 모두 거실 의자와 책상에 걸터 앉았다. 그 때 꺼누가 얼굴이 새파래져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왜…! 왜! 무슨 일이야!
— …화장실이 어디였지?
— 이런 시점에도 장 운동이 정말 활발하구나… 침실 쪽 벽에 난 옆문에 있었어.
— 긴장했더니…
꺼누는 텔라가 가리킨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하얀 타일로 뒤덮인 화장실 변기에 앉아, 꺼누는 이곳에 들어올 때부터 느껴진 기시감을 생각했다. 아담한 내부 공간에 비교해 밖에서 본 집의 면적은 꽤나 넓어 보였다. 가능한 경우는 두 가지였다. 외벽이 거의 성벽 수준으로 두껍거나, 우리가 아직 접근하지 못한 공간이 있거나…
꺼누는 분명 외벽과 맞닿아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변기 맞은편의 벽을 가볍게 두드렸다. 예상했던 둔탁한 소리와는 전혀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텅… 텅…
— …어? 뭐지?
꺼누는 타일 벽 너머에 공간이 있는 것을 직감하고는 주변을 살폈다. 세탁기 호스가 연결되어 있어야 할 십자 모양 수도꼭지가 눈에 들어왔다. 꺼누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다가가 수도꼭지를 돌렸다. 그러자 시원하게 쏟아져야 할 물은 나오지 않고 방금 전 꺼누가 두드린 빈 벽이 소름 끼치는 마찰음을 내며 돌아갔다. 벽 뒤로는 어두운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고, 계단에는 말라붙은 핏자국이 선명하게 나있었다.
— 이… 이게 대체 뭐하는 곳이지?
— 어이—! 뭐 찢어진 소리가 나는데 괜찮은 거 맞아—?!
— 아니 아니야! 거기서 난 소리가 아니야! 그것보다도 다들 얼른 들어와 봐!
**
일행은 바닥에 난 핏자국을 따라 지하실로 내려가고 있었다. 몇 군데 거미줄이 쳐있을 법도 한 지하 계단은 수상할 정도로 청결하게 관리되어 있었다. 아래로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탄내는 사라지고, 달큰한 향은 점차 짙어졌다.
지하실에 완전히 내려온 일행은 천장에 매달려 은은하게 빛나는 백열등 아래에 펼쳐진 광경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구석에 놓인 욕조에서는 끈적한 액체가 아직도 부글거리며 끓고 있었고, 책상 위에는 다양한 크기의 플라스크와 그 안에 담긴 정체불명의 시약들이 신비로운 광택을 내고 있었다. 계단 양쪽 벽면에는 온갖 종족들의 신체 부위, 심지어는 설치류 같은 소형 생명체들의 시체가 통째로 포르말린에 담겨 있었다. 일부는 생포되던 시점의 겁에 질린 표정과 필사적으로 도망가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 우욱…
— 이곳은 대체 무엇을 위한 실험실이었던 거지…?
— 목적은 모르겠지만… 누가 이곳을 사용했는지는 확실히 알겠군. 저길 봐.
꺼누가 가리킨 벽면에는 중앙의 마크가 새겨진 휘장이 양옆으로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본 루덴은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것을 느꼈다. 폐건물 지하에서 만난 중앙 연구관리국 과학자들, 와이번의 동굴 바닥에 널부러져 있던 과학자들의 가운. 전혀 관련이 없어 보였던 모든 사건들이 전부 이 비밀 실험실을 중심으로 모여 들고 있었다.
루덴은 달큰한 냄새의 발원지인 찐득한 액체가 담여 있는 욕조로 향했다. 욕조 옆 탁자에는 누군가가 만년필로 휘갈겨 적은 양피지 몇 장과 손바닥만한 크기의 노트 하나가 놓여 있었다. 루덴은 우선 양피지를 주워 들어 적힌 내용을 소리내어 읽었다.
— 물… 원시 생명의 모태… 플로우… 가장 완벽한 생명의 창조…
— 생명 창조? 그건 분명 중앙에서 금한지 오래인데, 어째서 중앙의 과학자들이 이런 실험을…?
자신 또한 인공적으로 창조된 생명으로서 안젤리나는 실험의 의도가 궁금했다. 자연 번식으로 태어난 생명에게는 없고, 인공 생명에게는 있는 것, 그것은 태어난 이유, 즉 삶의 목적이었다. 박사의 아내를 지키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창조된 자신은 어쩌면 아내의 죽음을 기점으로 삶의 목적을 상실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삶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목적을 상실한 채로 하염없이 표류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자신이 계속해서 찾고자 했던 삶 본연의 속성이지 않을까 안젤리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루덴이 계속해서 읽어 나간 연구 노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 ‘연구관리국에서는 그 어떤 종족보다도 가장 우수한 지능을 가진 생명을 창조하는 실험에 착수한다’, ‘그 실험의 목적은 입성 시험 개량 및 고도화에 있으며, 실험을 통해 창조된 생명체는 평생 시험 문제 풀이 및 출제, 그리고 군주의 통치의 자문관의 용도로 사용된다’.
— 이하 생성에 필요한 재료… 마력의 샘 가장 깊은 곳에서 길어온 물, 말벌의 독, 용의 날개, 요정의 꽃가루, 액화된 스펙터 농축액, 그리고…
— 그리고?
— 살아 있는 인간의 심장…
— 살아 있는 인간의 심장? 대체 어디서 살아있는 인간의 심장을 구해와?
그 말이 끝나자 루덴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해당 재료에 빨간색 체크 표시가 쳐져 있고, 그 아래에 ‘제공자: OO’라고 쓰인 것을 일행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양피지 아래에 놓여 있던 노트를 주워들었다. 표지의 왼쪽 아래에는 노트 주인의 이름 ‘OO’가 작게 적혀 있었다. 루덴은 양피지를 일행에게 건넨 뒤 노트를 펼쳐들었다.
**
X월 XX일, 하나의 우수종을 개량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더 희생되어야 하는가. 입성 시험에 통과한 뒤로 연구관리국에 배치 되었을 때가 생각난다. 나는 이런 실험에 투입이 되는 미래는 까마득히 모른 채, 그저 성공한 인생을 살게 되었다는 기쁨에만 들떠 있었다. 정말 바보처럼 말이지… 게다가 요즘 같이 이 실험실에 온 동료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반장은 재료를 구하러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게 된 이들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한다며 애도했지만, 이들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실험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연설했다. 우리가 이 실험을 계속 하는 것이 그들에 대한 애도일까, 아니면… 하루 빨리 이 실험을 중단시키는 것이…
X월 XX일, 가장 구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 되었던 용의 날개가 도착했다. 채취 현장에 1차로 투입된 두 명의 동료가 와이번에게 마취제를 투여하는 과정에서 투약량을 너무 낮게 조정하여, 날개를 자르던 중에 와이번이 깨어난 것으로 추정된다고, 2차로 투입된 동료로부터 전달 받았다. 그들은 동료의 시신을 강에 던졌다고 한다. 우리가 이런 실험을 진행했다는 것이 대외적으로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온 나라를 뒤흔들고도 남을 것이다. 실험에 발을 들인 이상 우리는 비밀 속에서만 살다가, 세상에 존재했는지도 모르게 죽어야 한다니. 이제는 정말 돌아갈 곳이 없는 걸까.
X월 XX일, 믿을 수가 없다. 동료들은… 재료를 가지러 갔다가 죽은 것이 아니었다. 나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간밤에 잠든 동료의 침대로 가 마취시키고는 입에 실험 약물을 털어넣는 반장의 모습을… 악마같은 자식… 어떻게 자기 동료들에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을까. 반장이 사지가 마비된 동료를 침대에서 끌어내 집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몰래 따라갔다. 희미한 달빛 아래에서 나의 동료는 흉측한 형태의 마물로 변해갔다. 이런 방식으로 얼마나 많은 동료들이 희생되었을까. 한시라도 빨리 여기를 빠져나가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당장 생각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제발… 생각해내.
X월 XX일, 아버지가 중태에 빠져서 하루 빨리 고향에 돌아가야 한다는 의사를 반장에게 전달했다. 물론 거짓말이었지만, 그는 의외로 짧게 알겠다고 대답하며 퇴직신청서에 서명을 했다. 짐을 싸면서도 기분이 이상했다. 퇴직 처리가 이렇게 순탄하게 이루어질 줄 누가 알았겠나. 왜 진작에 더 일찍 말하지 않았을까. 벌써 서리초원이 눈에 아른거린다. 그리운 나의 고향, 가족들, 친구들, 이들을 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어떤 이야기를 해줘야 할까. 중앙에서의 삶은 내가 생각하던 그런 삶이 아니었다고. 입성 시험에 통과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아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이미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방금 전 반장에게서 떠나기 전 마지막 식사를 하자는 요청을 받았다. 떠나는 마당에 무슨 부탁인들 못 들어주겠는가. 그 악마같은 자식과 마주하는 것도 오늘 부로 마지막이구나.
**
이 내용을 끝으로 일기에는 더는 어떤 기록도 적혀 있지 않았다. 기대에 가장 부풀어 있을 때, 죽임을 당하는 것은 대체 어떤 기분이었을지, 루덴은 더 생각하면 미쳐버릴 것만 같아서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 그런데 이상하네요. 분명 이 연구노트에 모든 재료들이 확보된 것처럼 빠짐 없이 체크 표시가 다 되어 있는데… 그럼 이 재료들이 다 섞인 용액이… 지금 여기 욕조에 들어 있는 이게 맞는 거겠죠?
— 그래보이는군. 아무래도 이런 건 마검사 형씨가 잘 알려나? 뭐 아는 거 없어?
꺼누는 옆에 있던 안젤리나의 어깨에 손을 툭 얹으며 말했다. 아까 전부터 깊은 생각에 잠긴 안젤리나는 순간 꺼누가 자신을 새삼 그와는 다른 인공 생명으로 취급하는 것처럼 느껴져 순간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 (탁) 손 치워. 기분 더럽게…
— 뭐야… 갑자기 왜 시비인데? 그냥 물어보는 것도 안 되나?
— 먼저 시비 턴 건 그쪽이고.
— 시비? 지금 이 자식 내가 그냥 물어본 거 가지고 시비 턴 거라고 말하고 있는 거지?
— 갑자기 인공 생명 취급하는 거 되게 불쾌해. 당장 사과해.
— 그럼 아니야? 사실을 얘기한 거 가지고 뭘 사과하는데? 혹시 너 만든 사람이 대가리에 피해의식 끄는 버튼은 안 달아 놨냐?
— …가만두지 않겠어.
태래는 안젤리나를, 텔라와 루나는 꺼누를 부여 잡고 말렸지만, 이미 둘은 거칠게 그들의 손에서 빠져나와 격돌했다. 제일 먼저 안젤리나가 꺼누의 멱살을 잡고는 생물 표본병이 모여있는 찬장으로 그를 던졌다. 유리로 된 찬장은 꺼누가 부딪힌 충격으로 문짝이 떨어져 나갔다. 꺼누는 짧게 신음하며 안젤리나를 죽일 듯이 노려 보았다.
— 윽, 저 개자식이…
— 쫄리냐? 덤벼 보든가.
— 그만…! 둘 다 지금 뭐하는 거예요! 아앗, 거기 뒤 조심하세요!
꺼누는 손에 집히는 모든 표본병을 안젤리나에게 집어 던졌다. 병이 깨지면서 안에 있던 내용물이 그리고 비밀실험실 사방으로 튀었다. 둘의 싸움은 좀처럼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때 남은 일행들과 책상 아래에 함께 숨어있던 태래는 무언가가 떠올랐다는 듯이 루나를 보고 말했다.
— 루나! 저희가 처음 만난 그 날 숲속에서 불렀던 노래! 그 노래를 당장 불러주세요!
— 네??? 그게 무슨…
— 빨리요!!!
— 네!!!…
♬~ ♪~ ♬~ ♪♬~ ♪~
루나가 노래를 시작하기 전 옆에 있던 태래, 루덴, 텔라는 재빨리 귀를 막았다. 이윽고 노래가 실험실 안을 가득 메웠고, 거세게 몸을 맞부딪히던 안젤리나와 꺼누는 어느새 스턴 상태가 되어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제서야 싸움을 피해 책상 아래에 들어가 있던 네 명은 가까스로 책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루덴은 나오자마자 가방에서 숲에서 채집해온 칡덩굴을 꺼내 멈춰버린 두 명의 손발을 잽싸게 묶어놓았다. 둘은 성난 얼굴로 멈춘 채 눈동자만 간신히 데굴데굴 움직일 뿐이었다.
— 세상에 살다살다 이런 경우 없는 것들을 봤나…
— 어… 근데 저는 버프 담당이 아니라, 디버프 담당인 건가요…?
— 루나양 당신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정말 이 파티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 최고의 아이돌…
살짝 묘한 기분이 들었던 루나는 태래의 극찬에 바로 기분이 좋아져서는 어깨가 한껏 올라갔다. 루덴이 이리저리 흩어진 유리병 파편들을 쳐다보고 있을 때, 갑자기 어딘가에서 낯선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 으으으…
— 으아아아악 귀신이다!!!
루덴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잽싸게 태래의 등 뒤에 숨었고, 텔라 역시 덩달아 놀라며 초코의 뒤에 몸을 바짝 웅크렸다.
— 초코 뒤에 숨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요…
— 저… 저길 봐…
텔라가 가리킨 곳은 안젤리나와 꺼누가 멈춰 서있는 바로 옆의 욕조였다. 안에 담겨서 부글부글 끓던 액체는 온데간데 없고, 그 자리에는 욕조의 가장자리를 붙잡고 힘겹게 일어서려고 하는 한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검은색 단발 머리와 붉은 눈, 그리고 새하얀 피부를 가진 소녀, 모두가 호문쿨루스가 탄생한 순간을 경이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루나의 벼락 같은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 다들 눈 감아————!!!!!!!
모두가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감은 사이, 루나는 자신의 천가방 안에서 비올 때 우비로 사용하려던 로브를 꺼내, 소녀에게 다가가 재빨리 뒤집어 씌웠다.
—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스턴이 서서히 풀리고 있는지 안젤리나가 입을 가까스로 움직이며 물었다. 안젤리나의 생명체 스캔 상으로도 소녀는 분명히 살아있는 생명으로 인식 되었다.
— 아무래도 두 분이 싸우는 중에 우연히 합성에 필요한 재료가 들어갔나봐요.
— 어떻게 그럴 수가… 이게 가능한 일인가?
— 살다보면 가끔 믿기 힘든 일이 일어나고는 하죠…
루덴은 욕조 가까이 다가가 안을 들여다 보았다. 안에는 꺼누가 집어 던져서 깨진 표본병 조각들이 가득 흩뿌려져 있었다. 그 중에서 루덴은 유일하게 글씨를 알아볼 수 있는 유리 조각하나를 조심스레 주워 들었다.
— Mimosa pudica L.
— 그게 뭔데?
— 미모사라는 식물이야. 그 있잖아. 건드리면 잎을 바로 닫아버리는 식물.
— 그게 어쩌면… 생명 합성의 마지막 재료였을까요…?
— 확신할 수는 없어. 그거 외에도 너무 많은 재료들이 들어가 버렸으니까… 거기 너네 둘, 서로 화해 안 하면 영원히 안 풀어줄 거야.
어느 새 스턴이 풀려 손발이 칡덩굴로 묶인 채로 바닥에 넘어진 안젤리나와 꺼누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서로 딴 곳만 쳐다볼 뿐이었다. 둘을 한심한 눈길로 쳐다보던 일행은 갑자기 개구리 우는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시선이 닿은 곳에서는 놀라운 일이 펼쳐지고 있었다. 병이 깨지며 흘러나온 개구리 표본과 똑같은 형상의 개구리 형체가 바닥에 앉아 있던 소녀의 주변을 폴짝폴짝 뛰어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소녀는 플로라에게서 떼어온 꽃잎 표본도 유심히 바라보더니, 이내 오른손의 검지 손가락을 허공으로 치켜들었다. 그러자 검지 손가락 끝에서 같은 모양 꽃잎을 가진 플로라 형체가 만들어져서는 방금 전 만들어진 개구리 위를 포르르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한동안 플로라를 유심히 노려보던 개구리는 순간 긴 혀를 빼들어 플로라를 한 입에 삼켜버리고는 그대로 연기처럼 증발해버렸다. 파티 일행은 모두 넋이 나간 채 이 기묘한 인형극을 그저 관람할 뿐이었다.
— 놀라운데… 일부만 보고도 전체를 만들어낼 수 있다니…
— 무엇보다도 이 아이, 정령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있나 봐요.
텔라는 자신과 닮아 있는 이 소녀의 능력을 파티 일행에게 간단히 설명했다. 자신의 능력이 동물이라는 이미 있는 존재를 잠시 빌려오는 것이라면 정령술은 존재를 일시적으로 새롭게 창조해내는 것에 가깝다, 그래서 정령술은 지속 시간이 일시적일지라도 여러 원소를 조합해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범위 내의 생명체를 전부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열심히 텔라의 설명을 듣던 안젤리나는 문득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려 소녀를 보았다. 펑퍼짐한 로브를 뒤집어 쓴 소녀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라는 것을 직감한 것일까? 안젤리나는 이 소녀의 시선으로부터 자연스레 자신이 박사의 손에 처음 만들어졌을 때를 떠올렸다. 박사가 입력해둔 데이터 덕에, 그는 눈을 뜨자마자 자신의 존재 목적을 곧바로 파악하고는 모든 임무를 수준급으로 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이 호문쿨루스 소녀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중앙의 통치와 시험에 기여하기 위해 창조된—목적이 뚜렷한 생명이라는 것부터 스스로 알지 못하지만, 지금 당장 알 필요도 전혀 없었다. 어떻게 만들어졌든 이제 막 태어난 존재에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단 하나뿐이었다.
— 안녕.
안젤리나가 바닥에 앉은 소녀에게 다가가 무릎을 쭈그린 채로 인사를 건넸다. 그것은 소녀가 이 세상에 온 것을 축하한다는 마음을 담은, 진심 어린 인사였다. 그러자 소녀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짓고는, 곧이어 안젤리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 …안녕.
**
늦은 저녁 소녀와 함께 해드는강에 돌아온 파티 일행은 그새 녹초가 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파티원들은 조용히 누누상점 2층에 위치한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서는 옷도 못 갈아 입은 채로 침대에 그대로 뻗어버렸다. 오로지 안젤리나와 소녀만이 일을 의뢰한 다다에게 찾아가, 오늘 있었던 모든 일을 설명해 주었다. 바닷가 절벽 위의 수상한 돌집, 지하에 숨겨진 중앙의 비밀 실험실, 서리초원 출신 OO의 기록, 그리고 이 소녀의 존재까지, 이야기를 들은 다다의 반응은 의외로 차분했다. 하지만 그 차분함 속에는 중앙을 향한 뿌리 깊은 분노가 들어 있었다.
— 쯧, 내 그럴 줄 알았다… 중앙놈들 요새 수상하게 잠잠하다 했더니 몰래 이런 일을 꾸미고 있었군.
— 그래서 아무튼… 이 친구예요.
— 안녕하세요.
소녀는 해드는강에 오는 동안 파티원들과 나눈 대화만으로 이미 타인과 큰 문제 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언어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이런 엄청난 존재가 원래의 목적대로 중앙에 들어갔더라면 왕국 전체가 어떻게 바뀌었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안젤리나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 안녕, 너는 이름이 뭐니?
— …이름이요?
— 아, 아직 이름을 못 지어줬어요.
— 뭐??? 너넨 무슨 애 이름도 안 지어주고 무작정 데려올 생각부터 하냐???
— 아니 그게…
안젤리나는 실시간으로 분노 게이지가 차오르는 다다를 애써 진정시켰다.
— 얼른 지어줘. 이름은 정말 중요한 거야. 숨쉬게만 둔다고 해서 살아있는 게 아니잖아. 이름을 붙여야 비로소 소중한 존재로 대우 받을 수 있게 되는 거야.
— 맞는 말이야. 하지만…
안젤리나는 돌아오는 길에 파티원들과 고민한 몇 가지 이름 후보들을 차례대로 읊었다. 김픽톤, 이괵퉁, 박훌에, 브리트니 점례, 캐서린 귀남… 다다는 이 절망적인 이름들을 듣자마자, 손으로 이마를 짚고는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 어 정말 안 되겠네… 기다려봐… 그럼… 먼 옛날 고대 그리스라는 나라에서 쓰던 말인데, ‘푸른 새싹’이라는 뜻의 ‘클로이(χλόη)’ 어때? 이제 막 새롭게 싹튼 생명이니까.
— 그런 건… 대체 어디 가서 배우고 오는 거야…?
— 그냥 많이 싸돌아 다니다 보면 이것저것 알게 되는 거지.
— 그래도 지금까지 나온 이름 중에는 가장 괜찮은 것 같아. 너는 어때?
— 좋습니다. 마음에 드는 이름이에요. 클로이… 이런 거겠죠?
클로이는 부드럽게 쥐고 있던 오른손을 들어 둘의 눈 앞에 펼쳐 보였다. 손바닥 위에서 푸른 새싹 하나가 빼꼼 자라났다. 그렇게 긴긴 겨울이 끝나고 봄이 찾아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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