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때로는 자신을 속이는 덧없는 희망으로 그 빈자리를 메워보려 했다. 희망, 희망, 이 희망이라는 방패로 그 공허한 가운데의 어두운 밤을 막아보려 애썼다. 하긴 이 방패 뒤에는 여전히 어두운 밤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끊임없이 나의 청춘을 소진시켰다.
— 루쉰(1881-1936, 중국의 문인)
이른 아침, 해드는강 다가치 뒷산 아래에서 두 사람이 살짝 기울어진 축대를 바라보고 서있다.
— 흠… 요즘 며칠간 비가 많이 오긴 했지? 이거… 괜찮으려나?
— 에이, 뭐. 냅둔다고 뭐 큰일이야 나겠어?
— 그렇지? 뭐 우리가 지금 당장 뭐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 맞다. 사실 저번에 어떤 드워프가 와서 보수 공사 도와줄테니 같이 하자고 제안하기는 했는데…
— 어허, 큰일 날 소리!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고 우리끼리 조용히 넘어가자구.
— 하… 그래도 이거 참…
**
한편 누누상점 2층 여관방에 묵게 된 안젤리나는 창가에 놓인 테이블 위에 양피지를 놓고 고민에 잠겨있다. 그는 이따가 해드는강 중심에 있는 게시판에 붙일 ‘파티원 모집’ 공고를 작성 중이다.
— [파티원 모집]…? 아니 이건 너무 형식적이잖아… [모험을 꿈꾸는 자, 나에게 오라]…? 아니 이건 너무 거창해… [ㅍr ㅌ1 ONE 모집
☏ 초➷보♛❊➤ 환영
]… 오 확실히 스팸으로 신고 먹기 좋겠는데?
난생 처음 적어보는 모집 공고에 안젤리나는 중앙 제어 장치가 터져버릴 지경이었다.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과 적절하게 쓰는 것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다니 현실이 통탄스러울 뿐이었다. 그 때 방문 밖에서 누군가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라며 대답을 하자, 상점 주인인 아기돼지수인 누누가 열린 문 틈사이로 고개를 삐죽 내민다.
— 좋은 아침—! 아침 먹을 거예요? 얼마 전에 두쫀쿠 왕창 김장해둔 게 있어서, 손님도 같이 먹으면 좋을 것 같아요.
— 아, 아뇨. 배는 고픈데 지금 당장 이게 급해서요.
— 어머나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밥도 안 먹고 해야 한대요? 들어가봐도 돼요?
— 네네. 들어오세요.
누누가 둠칫거리며 안젤리나의 방으로 들어왔다. 안젤리나는 아직 한 글자도 안 적힌 양피지를 보여주며, 파티원 모집 공고문을 쓰는 어려움을 털어놓는다. 그러자 누누의 눈빛이 반짝인다.
— 아니 이런 게 있으면 진작에 나를 불렀어야지! 상점 홍보하느라 게시판에 붙인 광고문 개수만 몇 백 개는 되겠어요!
— 와아—! 덕분에 살았네요.
마치 접신한 것처럼 홍보 문구를 쏟아내는 누누 옆에서, 안젤리나는 장장 1시간 동안 잡고 있던 파티원 모집 공고문에 내용을 빠르게 채워나간다.
**
그 날 정오, 해드는강 중앙 광장에 있는 게시판을 둘러싸고, 여러 명의 주민들이 웅성대며 서있다.
— 누가 장난 쳐놓은 거 아닐까?
— 장난이라기엔 너무 진지한데…?
— 막상 어디로 지원하라는 지도 안 적혀 있잖아?
하나같이 모두가 의문에 가득찬 눈길을 보내는 곳에는 어떤 공고문 한 장이 붙어 있다.
이 파티원 모집 공고는 아홉현자에서 최초로 시작되어 일 년에 왕국 한 바퀴를 돌면서 보는 이들에게 행운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지금은 당신이 보고 있는 이 공고를 보고, 당신은 일주일 안에 파티에 들어와야 합니다. 미신이라 할지 모르지만, 이 공고를 무시한 자는 한 달 안에 민들레홀씨증후군에 걸립니다. 기억해 주세요. 이 공고문을 보고 지원을 한 자에게는 어마어마한 행운이 깃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공고문에 낙서를 하거나 훼손을 하면 당신은 길을 가다가 드래곤의 똥을 맞아 죽을 것입니다. — 안젤리나(마검사)
그 때 인파를 뚫고 누군가 게시판 앞으로 가까이 다가온다. 그의 등에는 하얀 날개가 돋아 있다. 그는 한동안 유심히 공고문을 살펴 보고는 생각에 잠긴 뒤, 뒤를 돌아 곧장 누누상점이 있는 방향으로 향한다.
그 시각, 안젤리나와 누누 둘은 민트차를 나눠 마시며 상점 앞 벤치에 앉아 있다.
— 후후, 이제부터는 너무 많이 오면 어떻게 걸러낼지를 걱정해야겠군요.
— 네. 덕분에 잘 끝냈어요. 저도 이제 슬슬 준비를…
— …아
— ?
— …세상에
— ?? 왜요?
— 생각해보니 지원하려면 어디로 오라는지를 안 적었네요.
—
누누는 충격을 받고 용수철처럼 벤치에서 튕겨져 나왔고, 안젤리나는 가만히 앉아 입에서 민트차를 주르륵 뱉어냈다. 둘이 아연실색이 되어 있을 때, 갑자기 여관이 위치한 언덕 아래에서 누군가가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 누누—! 오랜만이에요.
— 아 태래! 어서와요—!
안젤리나는 태래라고 불리는 낯선 이가 점차 다가오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리 크지 않은 키, 햇빛을 받을 때 살짝 연노랑빛이 감도는 흰색의 머리칼, 흰 피부, 그리고 흰…
— 날개…?
— 아 이쪽은 처음 보겠네요. 소개할게요. 우리 상점에 종종 방문하는 천사족이고, 이름은 태래.
— 안녕하세요. 태래입니다. 공고 올리신 분 맞으시죠?
안젤리나와 누누는 공고문에 빠뜨린 내용을 알아차렸을 때보다 더 크게 놀라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이 모습을 본 태래도 덩달아 놀라서 방어 자세를 취했다.
— 뭐… 뭔데요? 뭔데?
— 아니… 어디로 오라는지도 안 적어놨는데, 어떻게 귀신 같이 알고 찾아 왔어요? 앗… ‘귀신 같이’ 라는 말은 천사족한테 실례인가? 제가 사실 천사를 만나본 적이 없어서요.
— 아니 그렇게 생각해 본 적 없는데, 그렇게 말하고 나니까 새삼 실례같이 느껴지네요. 하하.
— 정말 죄송합니다…
— 농담이에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괜시리 날갯죽지를 긁적이는 모습을 보며 안젤리나는 태래가 부끄러움이 많은 성격임을 짐작했다.
이후 상점 안으로 들어가서 소개 받은 태래의 신상은 이러했다.
해드는강 다가치에서 북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천사가 땅에서 나무처럼 솟아나는 성소(聖所)가 있다. 종교가 사라진 세계에, 천사는 경외의 대상이 아닌, 단지 한 생명체를 이르는 평범한 이름이 되어 있었다. 다만 천사의 본모습은 다른 종족이 시각적으로 인지하는 순간 미쳐버릴 수 있었기에, 천사족은 자의로든 타의로든 일정한 성소에서 평생을 살아가는 특수한 종족이었다. 서로에 대한 무지는 서로에 대한 몰이해와 편견을 낳았다. 고립된 환경 속에 수천 년을 살아온 천사들은 타 종족과 소통하는 법을 잊어버렸고, 천사와 대면할 일이 없는 타 종족들까지도 천사를 종교가 존재하던 과거의 영광에만 얽매여 살아가는 오만한 존재로 치부했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도 성소 바깥 세계에 호기심을 품는 ‘별종’이 있었고, 태래 역시 그런 별종 중의 하나였다. 태래는 인간과 가까운 모습으로 의태하는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계속 성소 밖으로 나가 다른 종족들과 소통을 시도했다. 그는 언젠가 누누에게 의태에 대해 인간으로 치면 “빙판길에서 하이힐을 신은 채로 넘어지지 않고 줄넘기 2단 뛰기를 하는“ 정도의 집중력과 체력을 쏟아야 한다고 묘사한 적이 있었다.
이런 별난 행동이 다른 천사들에게 결코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성소 어딜 가든 쏟아지는 따가운 눈초리와 뒤에서 들리는 숙덕거리는 소리는 익숙해질래야 도저히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그럼에도 태래는 자신의 모난 구석을 감추면 확실히 편하게 살 수 있는 곳보다는, 조금은 불편하게 살아도 모남을 감추지 않아도 되는 곳을 원했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내쫓길 바에야 자기 발로 직접 나가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성소에서 나올 때, 태래는 골무가 든 작은 배낭, 랜턴, 그리고 방패를 챙겼다. 그 방패는 원래 태래의 것이 아니었다. 과거 의태가 숙련되지 않던 시절, 태래는 성소 인근에 위치한 숲속에서 길을 잃은 병사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실수러 의태가 풀려버리는 바람에 본모습을 드러내고는 병사를 죽음에 이르게 한 적이 있었다. 방패는 그 병사의 것이었다.
깊은 밤, 태래는 그의 가족이 산다던 집 대문 앞에 그의 시신을 조용히 옮겨 놓으며, 천사가 평생 동안 느껴볼 일이 없는 감정인 ‘두려움’에 대해 생각했다. 단지 본모습을 드러내는 것만으로 타자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자신이, 그리고 어쩌면 영원히 타자와 자유롭고 평등한 소통이 불가능할 수 있다는 현실이 두려웠다. 태래는 천사가 신성한 존재이던 먼 엣날, 그들이 인간의 앞에 나타날 때 했다던 “두려워 말라”는 말을, 시신을 옮기고 돌아오는 길목에서 계속해서 되뇌었다.
— 두려워 말라, 두려워 말라, 두려워 말라, 두려워 말라…
**
배경 이야기를 다 듣고나서, 안젤리나는 태래가 돌아갈 곳이 없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마침 공격에 특화된 자신을 확실하게 지원해줄 수 있는 탱커를 제일 먼저 구할 계획이기도 했다. 이 어마어마한 행운에 안젤리나는 거의 승천할 것 같은 입꼬리를 애써 감추며 자기만의 힘겨운 싸움을 해나가고 있었다.
— 그렇군요. 혹시 그럼 지금 소중하게 여기시는 그 방패는…
— …아
— …?
— 어디에 뒀지?
— …???
— …
— 아… 아하하하하 괜찮습니다. 공고 보고 급하게 오시느라 못 챙기셨을 수도 있죠.
태래가 진심으로 당황한 모습에 안젤리나는 애써 괜찮다는 웃음을 지으며 상대를 안심시켜주었다. 그는 어서 이 민망한 상황을 무마할 요량으로 황급히 다음 주제를 꺼냈다.
— 지금부터는 사실 그냥 의례상 하는 절차가 될텐데, 파티 같은 단체 생활에 적합한지 적성을 검사하는 몇 가지 질문을 드릴 거예요. 괜찮으신가요?
— 네 괜찮습니다.
안젤리나는 자신의 데이터셋에서 검사 문항 일부를 다운로드했다. 안젤리나의 데이터셋에는 전국 각지의 인성면접, 심리테스트, 성격유형검사 문항이 저장되어 있었다. 언젠가 박사가 이런 검사를 받는 것에 심취해서 관련 내용을 모두 안젤리나에게 입력해둔 덕이었다. 그는 그 중에서도 태래가 통과하기 쉽도록 좋은 결과가 나오기 쉬운 검사 문항들만 빠르게 추렸다.
— 그럼 질문 드리겠습니다. 첫번째, 집에 칼을 든 강도가 들어왔습니다. 당신은 어디에 숨으시겠습니까?
— 음… 빠르게 반격해야 하니까 방문 뒤?
— 두번째, 당신은 산 속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그러던 늦은 밤, 빈 집을 발견해서 들어갔습니다. 시간이 너무 늦어 잠을 자려는데, 갑자기 "저기요"라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저기요"라고 말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 어린아이.
— 세번째, 누군가 당신에게 쇠사슬로 감겨 자물쇠로 잠긴 상자를 주며 열어보라고 말합니다. 이 때 당신은 어떻게 할 건가요?
— 그냥 안 열고 말죠.
— 네, 결과 나왔습니다. 당신은 싸이코패스입니다.
— 네?
— …어라? 뭐지? 잠시만요… 제가 다운 받은 질문이 뭔가 잘못 됐나봐요. 하하. 다시 제대로 질문 드릴게요.
그러나 수십 가지가 넘는 검사 문항을 들고 와도 결과는 동일하게 나왔다. 자신의 데이터셋에 입력된 검사 문항들이 오로지 박사와 같은 ‘인간’을 대상으로 한 문항이라는 것을 안젤리나는 알 도리가 없었다. 면접은 장장 세 시간을 넘어, 거의 저녁 먹을 시간이 다 되어서야 끝이 났다.
— 어… 태래씨는… 인성에서 탈락하셨습니다.
— 아… 넵…
안젤리나는 태래를 놓치는 것이 진심으로 아쉬웠지만, 정해진 기준을 따르는 것이 옳다는 생각을 하며 다른 파티원을 구해보기로 결심했다. 태래는 무안함에 처음 만났을 때처럼 연신 날갯죽지를 긁적이며 의자에서 일어나 먼저 방문을 열고 나왔다. 함께 일층으로 내려오니, 카운터에 앉아 마른 헝겊으로 포션병을 닦고 있던 누누가 그들을 불러 세웠다.
— 아니 무슨 면접을 이렇게까지 길게 한대요? 그건 그렇고 태래, 지난주에 우리 가게에 맡기고 간 방패는 계속 여기에 두고 있을 거예요? 계속 안 가져가면 저도 깜빡하고 파는 물건인 줄 알고 팔아버릴 수도 있다구요?
— …아!
—
— 여기 있었군요…
태래는 누누에게서 황급히 자신의 방패를 뺏어 들어 두 손에 꼭 움켜 쥐었다. 그러고는 혹시 이 예상치 못한 방패의 출현으로 인해 면접 결과가 바뀔 수 있는지 묻는 듯한 애처로운 얼굴로 안젤리나를 쳐다보았다. 안젤리나는 태래의 시선을 애써 회피하며 괜히 창밖만 내다볼 뿐이었다.
**
콰르르릉.
아득히 먼 곳에서 천둥이 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광장을 지나던 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 봤다. 올려다 본 하늘은 노을빛으로 빛나고 있었고, 그 아래에는 솜털 구름만 둥둥 떠다닐 뿐이었다.
하늘을 올려다 본 이들 중에는 마침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여관으로 향하던 안젤리나도 껴있었다. 점심에 천사족 방패병을 놓친 아쉬움은, 이미 해드는강 광장 건너편에 있는 식당에서 세이렌 요리사 다다의 특제 볶음밥을 먹은 뒤로 까마득히 잊어버린 뒤였다. 일 년 중 절반 정도는 여행을 떠나서 쉽게 맛보기 힘든 다다의 요리를 운좋게 맛볼 수 있었던 덕에 안젤리나는 콧노래까지 흥얼대며 여관으로 걸어 가던 길이었다.
— 웬 마른 하늘에 천둥 소리가…?
그 때, 뒷산 쪽에서 누군가의 찢어질 듯한 고함 소리가 광장에 모여 있던 인파를 가로질렀다.
— 산사태다!!!!!!!!!
산 한쪽 면이 마치 거대한 삽으로 도려낸 것마냥 풀썩 주저 앉아, 사면을 타고 토사가 무서운 속도로 쓸려 내려오고 있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건물 안에 있던 모든 해드는강주민들까지도 혼비백산해 빠져나와 광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엄마의 손을 놓쳐 당황한 아이의 울음소리와 인파에 휩쓸려 넘어져 밟힌 자의 비명 소리가 곳곳에 난무했다.
— 다들 뛰지 마세요! 이쪽으로 천천히 대피하세요! 노약자부터! 차례대로!
급히 식당에서 나온 다다는 목소리로 최면을 걸 수 있는 세이렌의 능력을 활용해 광장 한가운데에서 목소리로 주민들을 단번에 주목시켰다. 그리고는 광장 지하에 위치한 대피소 문을 열어 모두를 질서정연하게 대피시켰다. 안젤리나도 다다의 목소리에 홀려 지하로 대피하려던 찰나, 행렬에 있던 한 어머니의 다급한 외침에 찬물이라도 뒤집어 쓴 것처럼 최면 상태에서 깨어났다.
— 아이가…! 아이가 아직 산에서 안 돌아왔어요!!!
안젤리나는 대피소로 몰려드는 인파를 거슬러 곧장 산으로 내달렸다.
**
안젤리나가 가까스로 산과 맞닿은 축대 쪽에 도착했을 때, 오래도록 보수를 받지 못했던 축대는 이미 토사에 휩쓸려 제 기능을 하지 못한 채 형편 없이 무너져 내려 있었다.
다행히 산사태를 처음 알아차린 누군가의 외침 덕에 대피가 빨라 피해 범위 내에 있던 주민들은 일찍 대피한 듯했다. 그렇지만 혹시나 싶은 마음에 안젤리나는 계속해서 쏟아져 내려오는 돌덩이들을 단칼에 베어내며, 대피 못한 주민이 없는지 생명체 스캔으로 주변을 살폈다.
그 때 처참히 무너져 내린 축사 더미 아래에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 사… 살려주세요… 다리가…! 다리가 깔렸어요!
— 잠깐만 기다리세요! 바로 갈게!… 윽!
순간 집채만한 돌덩이 하나가 소리의 근원을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던 안젤리나의 오른팔을 직격했다. 그는 충격으로 땅바닥에 그대로 나동그라졌다. 곧장 일어나려고 오른팔로 바닥을 짚었지만, 회로가 손상되었는지 오른팔이 전혀 움직이지가 않았다.
—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안젤리나는 자신이 쓰러진 곳 바로 옆 축사 더미 밑에서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깨닫고는, 벌떡 일어나 남은 왼손을 사용해 필사적으로 더미를 파헤쳤다. 얼마 안 있어 눈물 범벅이 된 한 어린 아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젤리나는 예상치 못했던 낯익은 얼굴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얼마 전 해드는강으로 오는 선박 안에서 까불대다 안젤리나에게 머리를 한 대 맞은 개구쟁이 꼬마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꼬마는 겁에 질려 안젤리나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연신 살려달라고 외치며 그의 왼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꼬마의 다리를 빼내려면 그가 왼팔 사용해야 했다. 하지만 위급한 상황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은 아무리 꼬마일지라도 안젤리나가 쉽게 뿌리쳐 낼 수가 없었다. 이대로면 둘 모두의 생명이 위험했다.
그 때 안젤리나의 오른팔을 강타한 돌덩이보다 족히 두 배는 더 커보이는 돌덩이가 이들을 향해 날아 들었다. 안젤리나가 아무리 “잠깐 꼬마야, 잠깐!”을 외쳐도, 꼬마는 사력을 다해 안젤리나의 팔을 더 세게 감쌀 뿐이었다.
쾅——!!!!!!!!
이제 더는 글렀다고 생각하던 안젤리나는 귀가 찢어질 듯한 굉음이 자기한테서가 아닌, 자신의 바로 앞에서 나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질끈 감았던 두 눈을 조심스레 떴다. 바로 눈 앞에는 새하얀 날개가 있었다.
태래의 방패에 부딪힌 돌덩이는 그대로 산산조각이 나고 공중에서 잘게 흩어졌다. 그 와중에 마치 방패로 모든 충격을 흡수한 것마냥 태래는 한치의 흔들림조차 보이지 않았다. 태래가 뒤를 돌아보고는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 괜찮아요 마검사씨?!!
— 전 괜찮습니다! 대신 이 아이를 어서…!!
꼬마는 어느새 기절해서 다행히 안젤리나가 왼팔을 사용해 잔해를 걷어낼 수 있었다. 태래는 축 늘어진 꼬마를 등에 업고 끊임없이 쏟아지는 돌덩이들을 전부 방패로 막아내며 달렸다. 날개가 마치 강보처럼 꼬마를 감싸고 있었다. 안젤리나 역시 태래의 옆에서 엄호를 받으며 지하 대피소로 향했다.
**
다음날 아침, 땅을 관장하는 종족인 드워프 개리가 지하 대피소로 내려와 산사태가 온전히 멎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마침 북동쪽에 위치한 훈련장에서 체력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산이 미세하게 진동하는 것을 알아채고는 곧장 달려가 가장 먼저 산사태를 알린 것도 바로 개리였다. 그는 지하 대피소로 내려오자마자 분노에 가득찬 목소리로 누군가를 찾아다녔다.
— 야 축대 관리자 어딨어!!! 나와!!! 내가 축대 저거 저렇게 두면 안 된다고 몇 날 며칠을 이야기 했는데 기어이는 저걸 저렇게 둬서 이 꼴을 만들어 놔?!! 오죽했으면 내가 도와줄테니까 보수 공사좀 하자고 먼저 제안까지 했는데!!! 다른 것도 아니고 축대 무너져서 다친 사람이 나온 게 말이 돼?!!!!!! 좋은 말로 할 때 당장 나와!!!!!!!!!
이미 좋은 말은 아니었다. 올해 축대 관리자가 누구였지 웅성대는 주민들 뒤에서, 어느 두 사람이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며 출구 쪽으로 움직인다. 그 때 앞서 가던 한 명의 스텝이 꼬이는 바람에 둘은 서로 뒤엉켜 우당탕 요란한 소리를 내며 넘어진다. 그 소리는 개리의 귀에까지 들린다.
— 옳지, 너 이놈 자식들 딱 걸렸다!!! 거기서라앗—!!!
— 히이익 사람 살려——!!!
주민들은 곧 하나둘씩 대피소에서 빠져나왔다. 산에서 먼 쪽은 피해가 거의 없었지만, 산과 인접한 지역의 민가들의 피해가 상당했다. 일부는 적어도 파손된 집이 수리될 때까지 몇 주를 더 지하 대피소에서 생활해야 하는 지경이었다.
부상자는 안젤리나와 태래가 기적적으로 구출해낸 꼬마 한 명뿐이었지만 상태는 심각했다. 축대가 무너진 잔해에 깔렸던 꼬마의 왼쪽 다리는 다가치의 힐러를 총동원해도 회복 되지 않았다. 결국 꼬마는 다친 다리를 절단하고 기계로 만든 의족을 달게 되었다. 꼬마는 병문안차 들른 안젤리나를 보고는 자기도 사이보그 다리를 갖게 되었다며, 나중에 안젤리나와 같은 짱 쎈 마검사가 될 수 있겠냐고 물었다. 안젤리나는 목이 메여 짧게 “응”하고 대답하고는 무어라 말을 더 꺼낼 수가 없었다.
작별 인사를 나눈 뒤 꼬마의 집에서 나오자, 태래가 문 옆에는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당신도 들어가서 인사라도 하지 그랬어? 꼬맹이가 무척 기뻐할텐데.
— 기절했어서 아마 기억도 못할 겁니다.
— 그래도…
— 안젤리나씨.
— 응.
— 뜬금 없는 질문일 수 있지만, 혹시 안젤리나씨는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안젤리나는 질문을 듣자마자, 이전에 보았던 박사의 텅빈 눈, 눈물 한 방울조차 나오지 않게 메말라버린 그의 눈을 떠올렸지만,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태래는 고개를 푹 숙인 안젤리나의 모습을 잠시동안 지켜보았다가, 지긋이 눈을 감고,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 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누군가를 지키지 못한다는 것, 그것이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며 가장 두려워하게 된 것입니다.
—
— 그래서 저는 지금 대단히 두렵습니다. 아이를 지켜내지 못했으니까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안젤리나의 시야에 태래가 서있는 땅바닥으로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갑자기 비가 오나?’싶어 고개를 들어 올려다 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안젤리나는 곧이어 그것이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 저기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모든 걸 다 지켜낼 수 없어.
—
— 그리고 그렇다는 것은 반대로 모든 걸 다 망쳐버릴 수도 없다는 뜻이기도 해.
—
— 그리고 무엇보다도 꼬마는 지금 행복해 보였어. 너는 분명 꼬마의 행복을 지켜준 거야.
— 뿌애애애애앵———!
안젤리나의 마지막 말을 듣자 태래의 눈에서는 눈물이 거의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아니, 이것은 제트 분사였다. 한층 진중하던 분위기를 깨는 예상치도 못한 앙증맞은 울음소리에 안젤리나는 당황한 기색을 감출 수가 없었다. 지나가던 주민들까지도 어마어마한 울음소리와 이미 눈물로 웅덩이가 고인 것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 한 번씩 쳐다보고 갈 정도였다.
— 뭐… 뭐야…! 아니, 누가 정말 ‘뿌앵’ 하고 우는 건 처음 보네… 진정해!! 이봐요 진정하라고!!!!
— 뿌애애애애앵———!!!
— 아니 그만 좀 울어! 뚝! 뚝!!!
이윽고 2층 창문 밖으로 꼬마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는 아래에서 소란을 피우고 있는 둘을 발견한다.
— 뭐예요 누나, 아직 안 갔어요? 옆에는 누구예요?
— 야야야, 너 마침 잘 됐다. 잠깐 내려와서 얘 좀 같이 말려봐!!
좀처럼 울음을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 태래를 애써 달래며, 안젤리나는 두 가지 확신이 들었다.
첫째로 박사의 검사 문항이 그리 믿을만하지 않았다는 것과,
둘째로 이제부터 모험이 한층 더 왁자지껄해질 예정이라는 것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