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도 나처럼 발밑에 펴져야 비로소 완성되지만, 그 축축함이 드러내는 것은 무엇인가: 타는 듯한 수치심인가, 아니면 감정의 열기인가?
— <The Grass is Really Like Me>, 키슈와르 나히드(1940-, 파키스탄의 시인)
화창한 어느 토요일 오후, 안젤리나와 태래는 함께 해드는강의 시장이 들어선 거리를 거닐고 있다. 산사태 이후 해드는강에는 여러 변화가 있었다. 피해 현장은 개리가 각지에 흩어져 있던 드워프 무리를 불러내 신속하게 복구되고 있었다. 대지와 암석과 관련한 모든 일에는 대지의 요정인 드워프를 따라올 종족이 없었다. 나무의 정령인 엔트도 대거로 이주해 와서는 산사태가 일어났던 비탈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안젤리나와 태래는 해드는강 다가치 주민들 사이에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산사태에서 인간 아이를 구해낸 용사들로 이름이 난 것이었다. 하지만 유명해진 만큼, 그들 앞에는 수많은 요청들이 쏟아졌다.
— 나무 위에 고양이가 올라가 있어요! 도와주세요 용사님들!
— 내가 허리가 다쳐서 위에 찬장까지 손이 안 닿아서 그러는데, 좀 도와줄 수 있겠슈?
— 우물 안에 두레박이 빠졌는데, 용사님 혹시 꺼내주실 수 있나요?
해드는강 어디든 가는 곳마다 자잘하게 도움을 청해오는 일이 많아지자, 안젤리나는 지쳐서 은은히 짜증이 나기 시작한 참이었다. 그는 토요일 아침에 일어나서는, 태래가 묵고 있는 옆방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그러고는 오늘 하루 동안 절대 밖으로 나가지 않고 방 안에만 있겠다고 선언하였다. 태래는 그럼 오늘 하루 식사는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고 걱정스레 물었다.
— 배달! 배달을 시키면 되지!
— 이 세계에 그런 배달 업체가 있을리가요...
— 윽, 그런…
둘은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나눴지만, 확실한 것은 오늘 밖에 나가지 않으면 쫄쫄 굶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누누도 개리와 다다를 따라 마을 복구 작업에 참여하러 며칠간 상점을 비운 뒤였다. 안젤리나는 누누가 상점을 떠날 때 걱정하는 척, 사실 음식을 조금씩 나누어주는 사람이 없어진다는 상황에 덜컥 겁이 났던 것이었다.
— 아니 누누, 상점은요?! 상점은 누가 봐주죠?!
— 네 맞아요~ ‘누’가 봐줄 거예요!
— ‘누’요?
— 네 여기 ‘누’라는 이름의 당신이요~!
하면서 누누는 이번에 바위산길 상인에게서 새로 구한 흑요석 거울을 들이 밀며 안젤리나의 얼굴을 비췄다. 흑요석 거울에 비친 자신의 당황한 표정을 보자 안젤리나는 피식 웃음이 났다. 그 때만해도 별 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막상 그 상황에 맞닥뜨리고 나니 누누의 부재가 이렇게 큰 것이었나 생각하는 안젤리나였다.
무공 훈련 중에도 힘든 내색 한 번 하지 않았던 안젤리나가 이렇게까지 밥을 먹으려면 밖에 나가야 한다는 사실 앞에 극도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니, 아직 이 사이보그 마검사에 대해 알아갈 것이 많이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안젤리나와 태래는 산사태 이후로 가깝게 지내게 된 드워프 개리의 훈련장에 가서 종종 무공을 단련하고는 했다. 안젤리나는 산사태 복구 현장에서 자신의 오른팔을 으스러뜨린 바위를 한 손으로 가볍게 들어 올리는 개리를 보고, 홀린 듯이 파티 가입을 요청했지만, 개리는 이를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는 대신 무공 훈련이 필요하다면 자신의 훈련장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대답했다. 안젤리나가 기대하며 찾아간 무공 훈련장은 거의 허허벌판에 가까웠다. 광활한 모래바닥 위에는 무게별로 나뉜 돌덩이들과, 타고 오르내리는 덩굴 줄기, 그리고 그 옆에 물살이 거센 강에 카누 한 대가 놓여있을 뿐이었다. 박사에게 제공 받은 최첨단 장비와 고성능 전투 데이터팩을 통해 훈련을 받은 안젤리나로서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개리의 훈련을 받은지 5분도 안 되어 지쳐 땅바닥에 벌러덩 누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아, 확실히 여기면 강해질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에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 와! 요즘 비가 많이 오더니, 미나리가 엄청 싸네요, 안젤리나! 오늘 저녁에는 미나리랑 같이 조개도 사서 탕을 끓여먹는 건 어떨까요?
태래의 활기찬 목소리는 이미 안젤리나에게 들리지 않고 있었다. 아니, 그래서 훈련을 통해 강해져서 하는 거라곤 고양이 구출하기, 두레박 빼내기 같은 거라니! 안젤리나는 해드는강이 주는 환대가 마음에 들었지만, 한편으로 진정한 용사로서 모험을 떠나기 위해서는 한시라도 빨리 이 다가치를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돌아갈 집을 불태우고 떠나온 방랑 검객의 입장에서, 돌아갈 집을 만드는 것은 사치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제 태래라는 든든한 방패병도 얻었으니 해드는강 말고 다른 곳으로 가도 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잠시 딴 생각을 하면서 걷던 찰나, “안젤리나 앞에…!”라고 외치는 태래의 다급한 목소리와 동시에, ‘쾅’ 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안젤리나가 땅바닥에 넘어지면서 허공에는 수많은 약초 더미와 형형색색의 물약병들이 날았다.
— 으윽…
— 아이씨… 눈은 장식으로 달고 다니나…
사용하는 표현이 거칠지만 어딘가 앳된 목소리가 나즈막히 들려왔다. 안젤리나는 소리가 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개과의 얼굴을 한 수인 하나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껏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코볼트’, 까마득한 과거 어느 시대부터 인간과 동물간의 생식이 가능해지고, 전세계적인 저출생 문제가 도래된 이후부터 그 존재가 인정 받은 종족이지만, 여전히 ‘덜 진화한 인간’과 같은 취급을 받으며 평생을 인간으로부터 멸시 받는 종족. 코볼트가 인간을 못살게 군다는 소문은 인간이 먼저 코볼트를 차별했기 때문이었지만, 그 내막은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은 종족이라는 것을, 안젤리나는 생명체 스캔 기능을 통해 단번에 파악했다.
— 아, 코볼트…
— 뭐야… 코볼트 처음 보나…
송곳니를 한껏 드러내고 궁시렁대던 코볼트는 부딪힌 상대의 얼굴을 보자마자 갑자기 두 눈이 동그래졌다.
— 앗 혹시, 그 산사태… 용사님들…?
— 엇… 어… 네… 네…? 네… 아마 맞을 거예요.
자신의 두 손을 덥썩 붙잡으며 얼굴을 바짝 들이미는 코볼트가 상당히 부담스럽다고 느끼며, 안젤리나는 졸지에 ‘아니예요. 잘못 봤습니다’라고 얘기하려던 속마음과는 다르게 곧이 곧대로 사실을 고해버렸다. 그러고는 ‘아차…’ 잘못 대답했다는 사실에 후회하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사이 태래는 땅에 떨어진 약초와 물약을 주워다 코볼트에게 건네주었다.
— 감사해요. 와… 소문으로만 들었지,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 네? 네… 네!!! 하하하… 네 저도 만나서 반갑습니다…
안젤리나는 이미 이 코볼트가 호들갑을 떠는 것이 분명 자신에게 무언가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라 생각하여, 이곳에서 당장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만 굴뚝 같았다. 한껏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상황을 빠져나오려고 한 안젤리나에게 들려온 말은 전혀 예상 밖의 말이었다.
— 저… 사실 제가 물약을 좀 제조할 수 있는데요. 얼마 전에 진통 효과가 뛰어난 약초를 발견해서 그거로 물약 하나를 만들어 봤거든요. 산사태 이후로 많이 다치셨다고 들었는데, 요새도 막 팔이 결리거나 그러시진 않나요?
— 헉. 맞아요. 맞은 곳이 가끔 결려서 되게 불편해요.
— 그럼… 이 포션… 한 번 드셔보세요. 분명 아픈 게 훨씬 나아질 거예요…!
코볼트가 땅에 떨어진 병 중, 갈색의 액체가 담긴 유리병 하나를 건넸다. 안젤리나는 여태까지 자신에게 먼저 요청만 하는 이들만 보다가, 이렇게 도움을 주는 이를 마주하고는 경계심이 한껏 누그러진 상태가 되었다. 코볼트가 준 약병을 한숨에 들이키려던 것을 태래가 막아섰다.
— 안젤리나, 잠깐. 그래도 누가 준 무슨 약인지 확인도 안 하고 마시면…
— 앗, 제 이름은 루덴이예요. 저기 해드는강 초입에 있는 집에 세들어 살고 있어요.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면 여기로 오시면 돼요.
— 태래 거봐. 착한 애라니까. 너도 어깨가 좀 뻐근하다고 하지 않았어? 좀 나눠줄까?
— 앗, 방패병님 것도 따로 드릴 수 있어요 자, 여기요!
루덴은 아직 수습도 안 된 약초와 물약 더미 속에서 비슷한 갈색 액체가 담긴 물약병을 찾아내 태래에게 건넸다. 태래는 이를 거절하려다, 불현듯 타 종족을 믿지 않는 등한시하는 성소의 천사족들이 떠올랐다. 자신이 싫어한 이들과 스스로가 같은 전철을 밟는 것이 아닌가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는 급하게 물약병을 받아들고는 그대로 입에 털어 넣었다. 안젤리나도 이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면서 자신도 루덴이 건넨 진통 효과가 있다던 물약을 꿀꺽꿀꺽 들이켰다. 갈색의 물약은 처음 혀끝에 닿았을 때 달큰한 맛이 나다가, 이후 목에 넘어가면서는 다소 쓰고 떫은 향을 풍겼다.
**
그 다음 날인 일요일 아침, 안젤리나는 옆 방에서 나는 태래의 고함 소리와 화분이 깨진 듯한 날카로운 굉음을 들으며 잠에서 깨어났다.
— 덤벼…! 덤벼 이 악마들아…!!!
옆방에서 당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도저히 짐작할 수 없던 안젤리나는 서둘러 머리 맡에 놓여 있던 검을 챙긴 뒤 조심스레 태래가 묵는 방으로 다가갔다. 방문을 박차고 공격태세를 취한 안젤리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동공이 한껏 확장된 채로, 입에서는 침을 질질 흘리면서 좀비같이 뛰어다니는 태래가 눈에 들어온 것이었다. 태래는 방에 있던 화분과 액자를 다 부순 뒤에, 2층 창문으로 막 뛰어내리려고 하던 찰나였다. 안젤리나는 가까스로 태래의 손발을 밧줄로 묶고 진정시켰다. 밧줄로 묶고 난 뒤에도, 태래는 초점이 없는 눈동자로, 이를테면 "나는 나는 갈테야. 연못으로 갈테야." 같이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연신 되뇌일 뿐이었다.
— 뭐야?! 정신 나갔어?!
— 뭐—?! 내가 정신이 나가고 안 나가고는 당신이 신경쓸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 진짜 단단히 정신 나갔네… (퍽)
— 으윽…
안젤리나가 태래의 뒷목을 치자, 태래는 마치 스위치가 꺼진 풍선 인형마냥 마냥 앞으로 고꾸라졌다. 기절한 태래를 어깨에 들쳐 메고 안젤리나는 계단을 내려와, 거센 발길질을 하며 상점 대문을 박차고 나왔다. 오늘만큼은 정말 방에만 있으려고 했는데, 대체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싶을 뿐이었다. 체격이 그리 우람하지 않았던 태래였지만, 인사불성이 된 그는 마치 물을 한껏 머금은 솜이불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한참을 땅바닥에 질질 끌며 해드는강 광장을 건너 도착한 의원에서 안젤리나는 의외의 소견을 들을 수 있었다.
— 헤헤헤… 나는 날개 있다… 날개야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 음… 이건… 어디선가 많이 봤는데…
곤충족 꿀벌 의사는 태래의 전신을 더듬이로 훑고 이내 고민에 빠진 듯 하더니, 순간 무엇인가 떠올랐다는 듯 진료실 뒤로 가 책장에 꽂혀있던 약초 도감을 꺼내 바쁘게 뒤지기 시작했다. 이내 그는 어떤 페이지에 시선을 멈춘 뒤, 온몸의 털을 바짝 세우며 안젤리나에게 다가와 약초 도감의 한 페이지를 들이대며 물었다. 안젤리나의 눈에는 특별할 것 없는 연두색의 넓적한 이파리 모양에, 마치 방울 같은 작은 자주색 꽃이 두드러지는 식물이 보였다.
— 혹시, 이 식물…! 산에서 이렇게 생긴 식물을 따다가 먹은 적이 있나요?!
— 네…? 요즘 산 근처에도 안 갔거니와… 정말 처음 보는 식물인데요…
— 허어… 그것 참 이상한 일이네요. 증상으로 보면 확실히 이 식물을 먹었을 때 나타나는 증상인데 말이죠…
— 나는 갈테야… 연못으로 갈테야…
— 어어 환자분 진정하세요. 간호사—!!
태래는 현재 인간과 유사한 형상으로 의태해 있으면서 인간족이 가지고 있는 신체적 약점을 전부 감내하고 있었다. 산사태 이후 태래와 산을 간 적도 없거니와, 겨울철이라 약초를 뜯어 먹은 적도 없는 입장에서, 안젤리나는 몇 번이고 자신의 기억 중추에 저장된 장면들을 되살려야 했다. 태래를 처음 만나 면접을 보던 장면, 산사태가 일어났을 때 태래가 자신을 구해주던 장면, 누누의 두쫀쿠를 함께 나누어 먹던 장면, 시장을 거닐던 장면, 그리고…
— 어…?
— 어……? 뭔가 떠올랐나요?
— 아… 그…미친 코볼트…
안젤리나는 확실하게 그 장면을 떠올렸다. 자신이 루덴이라는 이름의 코볼트와 시장에서 부딪힌 뒤에 벌어진 일들을.
**
꿀벌의원 주사실에서 항정신성 약물 링거를 맞고난 뒤에야, 태래는 비로소 제정신을 찾을 수 있었다.
— 으… 으음… 안젤리나, 이게 무슨 상황이죠? 머리가 깨질 것 같은데요…
— 아냐. 별일 아니야. 신경 끄고 잠깐 쉬고 있어.
— 네…
태래는 자신이 방에서 피운 소동뿐만 아니아, 자신이 왜 의원 안에 누워 있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어젯밤 저녁을 먹고 난 뒤 계속해서 구토가 나와 화장실을 몇 번이고 들락날락한 뒤에야 겨우 잠에 들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저녁에 끓여 먹은 조개가 상했다고 생각했지만, 문제는 조개에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 때, 꿀벌 의사가 앞발로 연신 분주하게 얼굴을 닦으며 주사실 안으로 들어왔다.
— 오…! 깨어나셨군요. 확실히 효과가 세지요? 확실히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이 풀에 중독되어서 저희 의원을 찾는 분들이 ‘종족’을 불문하고 ‘종종’ 생기더군요. 하하!
— …
— …
의사는 되도 않는 말장난에 안젤리나와 태래는 일순간 싸늘하게 얼어 붙었다. 꿀벌 의사는 둘의 반응이 보이지도 않는 것마냥 신경도 쓰지 않고, 병상에 상체만 겨우 일으켜 세운 태래에게 다가와 진맥을 짚었다.
— 이제 확실히 독기는 빠진 것 같아요. 이렇게까지 회복이 빠른 것도 놀라워요.
사실 태래가 회복되기까지 한 나절이 채 걸리지 않은 것은 분명 놀라운 일이었다. 안젤리나는 어딘가 돌팔이 같아 보여도 모험 중에 부상을 당하면 지체 없이 이 꿀벌 의사를 찾아 와야겠다고 다짐했다.
— 자… 그럼 이제 슬슬 치료비를 계산해 봅시다… 우선 기본 진료비 10만원에, 응급환자니까 10만원 추가, 링거는 우리 의원 특별 제조 링거라서 비급여 항목이니까 20만원, 그리고 입원 비용 시간당 5만원…
의사가 어마어마한 숫자들을 끝없이 더해가는 동안,
안젤리나와 태래는 조용히 서로의 시선을 마주했다.
— …너 지금 움직일 수 있지?
— 네.
— 오케이, 그럼 지금 어떻게 해야하는지도 알겠지?
— 네.
— 뛰어.
와장창.
안젤리나는 그새 정신을 차린 태래와 함께 의원 창문을 부수고 뛰쳐 나갔다. 간호사들의 거센 날갯짓 소리가 뒤에서 들려오는 중에도 둘은 멈추지 않고 거리를 내달렸다. 안젤리나는 죽을 힘을 다해 달리며 앞으로 모험을 하는 중에 꼭 번 돈 일부를 공공의료보험법 제정을 촉구하는 사회단체에 조금씩이라도 후원하리라 다짐하는 것이었다.
**
안젤리나와 태래가 한참을 달려도 꿀벌들의 격렬한 날갯짓 소리는 멀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먼 옛날부터 꿀벌족은 꿀 1kg을 생산하기 위해 약 400,000송이 이상의 꽃을 방문하며, 지구 네 바퀴 반에 해당하는 약 160,000km 이상을 비행하는 엄청난 노동을 수행하던 종족이었기에, 그 어떤 종족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우수한 지구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나마 며칠 간 수행한 개리의 무공 훈련 덕에 안젤리나와 태래는 꿀벌 의사를 따돌리며 끈질기게 도망을 칠 수 있었다.
— 용사님들—!! 진료비는 주고 가셔야죠—!!!!
— 헉… 허억… 잡히면… 파산이야… 멈추지 마…
다가치 광장을 지나고, 시장으로 들어선 안젤리나와 태래는 또 다시 어딘가 익숙한 실루엣을 앞에 마주했다. 카키색 니트 조끼에 검은색 바지를 입고 한쪽 어깨에 약초가 왕창 들어 있는 크로스백을 맨…
— 이 미친 코볼트 자식—!
— 어어…! 안녕하세요? 또 만났…
— 너… 너 이 자식 거기 서라—!
— 어어—??? 어어어???
루덴은 영문도 모른 채, 자신을 향해 죽일 듯이 뛰어오는 두 용사를 보고는, 본능적으로 잡히면 뒤진다는 생각을 하여 미친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가 뜀박질을 할 때마다 야산에서 채집해온 약초 다발이 가방에서 넘쳐 흘러 길바닥에 하나둘씩 흩뿌려졌다.
— 잠깐 잠깐, 이게 무슨 일이죠—?!!!
— 잡히면 가만 안둔다. 이 약팔이 코볼트놈아—!!!
— 용사님들—!!! 요금 수납은 하고 가세요—!!!
시장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쫓고 쫓기는 추격전은 지나가던 모든 이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영문도 모르고 쫓기는 와중에도, 다소 내성적인 성격이던 루덴은 자신에게 이렇게 많은 관심이 쏟아지는 것을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그는 이내 재빨리 시장 옆길로 새서는 햇빛이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골목으로 들어섰다. 그 뒤를 차례대로 안젤리나와 태래, 그리고 꿀벌들이 따랐다.
급히 골목길 모퉁이를 돌자, 골목 밖에서는 보이지도 않던 건물로 통하는 작고 낡은 철문이 루덴의 눈에 들어왔다. 그가 철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래로 끝없이 내려가는 계단이 펼쳐졌다. 루덴은 덜컥 겁이 났지만, 용사와 꿀벌들을 이보다 확실하게 따돌릴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 하… 아까도 마셔서 좀 위험할텐데…
그는 재빨리 자신의 포션 가방을 열어 투명한 물이 담긴 플라스크병에 [카페인 생성 주문]을 외웠다. 이내 물이 샛노랗게 변하자, 루덴은 카페인 포션을 단숨에 들이키고는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갔다.
**
지하 몇 층인지도 적혀있지 않고, 중간에 어디론가 빠져나오는 문도 없는 희한한 공간이었다. 계단참 벽에 설치된 수은등만이 희미한 청백색의 빛을 내뿜으며 어둠을 밝히고 있을 뿐이었다. 수은등이 마치 심해로 잠수하던 중에 마주친 초롱아귀 같다는 생각을 하며 루덴은 마침내 계단 끝에 도달했다. 그곳에는 녹이 심하게 슨 또 다른 철문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제 뒤에서 쫓아오는 소리도 들리지 않으니 여기에 잠깐 숨어 있다가 다시 밖으로 나가면 되겠다고 생각한 그 때, 붉게 녹슨 문 뒤에서 여럿이 작게 웅성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덴은 털로 뒤덮인 귀를 쫑긋 세우며 철문에 조심스레 귀를 갖다 대었다. 코볼트의 뛰어난 청력 덕에 그는 문 안쪽에 인간족 성인 남성 둘, 그리고 간간히 들려오는 윙윙 소리로 추측컨대 곤충족이 또 한 명 있음을 확신했다. 다만 방금 전까지 쫓아오던 꿀벌의 날갯짓 소리와는 비교도 안 되게 크고 낮은 소리, 마치 전투 헬기를 연상시키는 소리가 온몸의 털을 곤두서게 했다
— 이봐, 약속한 것과 다른 걸 가져오면 어떡해? 우리는 살아있는 개체에게서 추출한 독을 요구했을텐데, 이런 죽은 사체에서 추출한 독이 아니라?
— 색이 좀 탁할 뿐이지 성분에 차이는 없을 것이다. 당신네들이 진행하는 실험에 필요한 성분은 다 들어있어.
— 그걸 판단하는 건 우리지 네 녀석이 아니야. 처신 똑바로 하는 게 좋아. 연구관리국에 안좋게 보고가 들어가면 당신네 종족이 몰살당하는 건 일도 아닐테고.
— 이 자식들이 나를 앞에 두고도 목숨이 아깝지가 않나보… 잠깐
방금 전까지 잘 들리던 대화 소리가 일순간에 끊기자, 자기 귀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잠시 문에서 귀를 떼어 귓구멍을 후볐다. 그 순간 느닷없이 거대한 침 하나가 철문을 뚫더니, 루덴의 콧잔등을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몇 초 전까지 자신이 귀를 대고 있던 철문이 마치 종잇장처럼 뚫리는 모습에 루덴은 지금 절대 비명을 지르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꽉 다문 입을 비집고 터져나오는 비명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이제 확실히 문 안에 있던 곤충족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 웬 쥐새끼 한 마리가 엿듣고 있었군.
— 끄아아아악——!!
— 녀석을 당장 잡아! 기밀이 탄로나선 안 돼!
— 그건 당신네들 사정이지 않나? 그래도 쥐새끼 하나 잡는 건 일도 아니지.
뚫린 문틈 사이로 중앙의 마크가 새겨진 흰색 가운을 입은 과학자 둘이 루덴을 가리키며 다급하게 외쳤고, 그들의 키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말벌이 위협적으로 턱을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루덴을 향해 다가왔다.
루덴은 아까 용사들과 꿀벌에게서 도망칠 때보다 더 필사적으로 계단을 뛰어 오르고 있었다. 말벌은 금방이라도 날개를 써서 쫓아올 수 있었지만, 마치 사냥감을 가지고 노는 것 자체가 즐겁다는 듯이, 루덴의 속도에 맞추어 서서히 뒤를 쫓았다.
— 그 죽기 전의 필사적인 눈빛, 아주 마음에 들어. 계속 도망쳐 봐.
계단을 한참 동안 뛰어 오른 루덴의 눈 앞에 드디어 철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살았다’고 희망을 품은 순간, 갑자기 루덴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대로 계단 중간에 주저 앉아버렸다. 고카페인 약물로 인한 카페인 쇼크, 그로 인해 다리 근육이 경련을 일으킨 것이었다.
— 제길. 안 돼…! 제발… 움직여…!!!
— 아하하하—! 살려는 의욕마저 잃었나보군. 이제 슬슬 흥미가 떨어지니, 한 번에 보내주도록 하지.
자신을 향해 곧장 날아오는 서슬 퍼런 독침을 보자, 루덴은 이제 더 이상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여,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서걱.
— 이봐 약팔이, 정신 차려! 태래, 뒤에서 엄호해!
— 네!
— 크아아악!
급하게 철문을 열고 들어온 안젤리나는 루덴이 죽을 위기에 처한 것을 보고는 곧장 마력 날려 말벌의 독침을 파괴했다. 말벌은 고통에 몸부림을 치며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루덴은 방패를 든 태래의 엄호를 받으며 철문을 빠져나왔고, 안젤리나도 이들을 뒤따라 뒷걸음질치며 무사히 건물을 나왔다.
**
루덴은 광장에 나올 때까지도 뒤에서 말벌이 쫓아오지는 않을까 불안에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이 떨고 있었다. 안전한 곳에 다다르자, 안젤리나와 태래는 그제서야 루덴을 벤치에 앉혀두고, 짐짓 사나운 표정을 지었다.
— 그래서 구해준 건 둘째 치고, 우리한테 대체 왜 그런 포션을 준 거야?
— 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제가 드린 건 효과가 확실한 진통제였는데
— 너가 준 약을 먹고 얘가 오늘 아침에 미치광이처럼 변해서 얼마나 힘들었는 줄 알아?
— 미치광이라뇨. 안젤리나, 아무리 그래도
— 네… 맞아요, ‘미치광이’.
— …?
루덴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하고는, 자신의 가방을 꺼내 초록색 잎사귀 다발을 꺼냈다. 꿀벌 의사가 안젤리나에게 보여준 바로 그 약초였다.
— 이게 ‘미치광이풀’이에요. 진통제로 가장 많이 쓰이고, 정신적 안정, 위통, 간질, 근육경련 완화, 설사, 치통에 효과가 있죠. 아 카페인 중화작용에도 쓸 수 있겠구나, 잠시만요.
— 어어 잠깐만…
안젤리나와 태래가 말리기도 전에, 루덴은 투명한 물이 담긴 플라스크에 미치광이풀 한 움큼을 쥐어 넣고는 양옆으로 몇 번 부드럽게 흔든 뒤, 무어라 중얼거리며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단숨에 미치광이풀은 물에 용해되어 갈색 빛을 내는 액체가 만들어졌다. 루덴과 처음 만났을 때 받아서 마셨던, 바로 그 물약이었다. 물약을 단숨에 들이키자 루덴은 얼굴에 생기가 돌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제자리에서 뜀뛰기를 하기 시작했다.
— 거봐요. 이렇게 효과가 좋다니까요. 태래님의 물약은 아마…
— 제 물약은…?
— 죄송해요. 사실 물약 제조 주문이 전부 인간의 발음 구조에 맞춰져 있어서, 제가 주문을 통해 만드는 포션이 종종 이상하게 배합될 때가 있더라구요. 제가 방금 포션 만들면서 외운 주문은 가장 간단한 주문에 속하는 [식물을 물에 녹이는 주문]인데, 아무래도 주문을 잘못 발음해서 배합 함량을 조절하지 못했나봐요.
— 일종의 가챠인 거네… 아니 잠깐, 그런데도 그렇게 지나가던 우리한테 무턱대고 포션을 준 건 너무 위험한 거 아냐?
— 그냥, 도움이 되고 싶었으니까요…
‘그냥 도움이 되고 싶었다’는 말에 안젤리나는 순간 뒤통수를 한 대 세게 얻어 맞은 것처럼 얼얼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기본적인 선의마저 부정해버린다면, 이 세상에 지켜내야 할 정의는 결코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타인과의 대화를 다소 어려워 하는 것 같고, 심지어는 자신이 의심 받는 상황에서 직접 자기 몸에 투여하는 과정까지 보여주는 매드사이언티스트같은 기질이 있지만, 그것은 그만큼 자신의 기술에 대한 확신이 있다는 것이고, 무엇보다도 일단… 착한 녀석인 것은 분명했다.
— 태래, 어때?
— 저번에 저한테 하셨던 것처럼 이분께도 면접을 보게 하신다면, 분명 인성면접에서 백퍼 탈락하시겠죠…
— 그건 맞지.
— 그래서 저는 오히려 저희 파티에 이 분이 꼭 필요하다는 확신이 드네요.
둘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눈 뒤, 바로 앞에 어리둥절해 고개를 갸웃거리는 루덴을 동시에 바라보았다.
— 루덴… 이라고 했나?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어디야?
— 저기 산 아래 코볼트족 쉐어하우스에서 살고 있어요. 그런데 얼마 전에 산사태 때문에 묵고 있는 방 절반이 거의 무너져버렸죠. 요새 시장에 계속 나온 이유도 그것 때문이에요. 해드는강 협동조합에 가입 되어 있는 조합원들만 수리를 받았는데, 저는 조합원이 아니라서 사비로 집 수리를 해야 돼요. 비용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아서…
— 그럼 우리 파티에 들어올래? 벌어들이는 비용 정확히 1/3해서 줄게.
— 두 분 돈은 많이 버세요…? 요즘 두 분 해드는강에서 잡일 시키면 잘 해준다고 호구 잡힌 거로 되게 유명한데…
— 아오, 말하는 뽄새 하고는!
— 으읍…! 읍!!!
안젤리나가 참다 못해 루덴의 입을 말아 쥐자 루덴은 뭐라 웅얼거리며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려 발버둥쳤다. 이윽고 루덴이 K.O. 싸인으로 연신 땅바닥을 손으로 내리치는 것을 보고 그제야 안젤리나는 주둥이를 거머쥔 주먹을 풀었다.
— 프휴…! 세상에 이렇게 과격한 게 무슨 용사라고…
— 너…? 또
— 스돕—! 아무튼 간에… 전 좋아요. 사실 돈은 잘 벌든 말든 관심 없어요. 시장에서 인간들 마주하면서 장사하는 것보다 마물들을 마주하는 게 좀 더 적성에 맞겠네요. 어쩌면 마물들을 이용해 새로운 포션 조합을 만들어볼 수도 있겠고… 파티에 참가할게요.
— 음… 방금 되게 포션 미치광이의 위험한 발언이 지나간 것 같지만…? 아무렴 어때. 좋아, 루덴. 오늘 부로 우리 파티에 들어온 것을 환영해.
태래는 안젤리나 대신 파티 가입을 환영하는 인사를 루덴에게 건넸다. 루덴은 안젤리나보다 신사적인 태래의 태도에 감동해 벌써 자신이 가지고 있는 포션과 약초더미를 벤치에 주르륵 늘어놓고는 효능을 하나씩 설명을 해주기 시작한 터였다. 그새 날이 저물어 그들이 모여 있던 벤치 옆에 켜진 가로등 불빛으로 날벌레들이 점차 모여들기 시작했다. 안젤리나는 죽음을 불사하고 빛을 향해 뛰어드는 날벌레들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 그리고 또 이상한 거 만들어서 누구 하나 잡기 전에 발음 연습도 좀 많이 해두고….
—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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