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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민들레의 기억: 사이보그 마검사, 안젤리나의 이야기

어떠한 강한 바람이 불어와도, 결의라고 하는 날개를 꺾는 것은 불가능해. 세계가 잃어버린 이야기를 되돌리는 것은 누구의 검인가? — <終端の王と異世界の騎士 ~ The Endia & The Knights ~>, Sound Horizon
짙은 먹구름 낀 하늘 아래, 하얀 파도가 뱃전을 때리며 수백 갈래의 물방울로 산산히 부서지는 자태가 기계로 만들어진 눈동자에 맺힌다.
해드는강 다가치로 향하는 선박은 거친 물살을 가르며 나아가고 있다. 뱃머리에는 한 검객이 우두커니 서있다. 그는 칼집에 꽂아둔 칼자루를 굳게 움켜쥔 채로 끝없이 펼쳐진 어두운 수평선 너머를 응시한다.
덥수룩한 수염을 한 선원이 갑판 아래로 내려가다가 뱃머리에 서있던 그를 발견한다.
— 어이 형씨, 이제 풍랑이 거세질 거야. 갑판에서 내려오는 게 좋을걸?
— …
— 쯧, 챙겨줬더니 사람 무시하기나 하고… 역시 사이보그들이란…
‘사이보그’, 그것이 평소 그가 ‘마검사’라거나, ‘검객’이라거나하는 호칭보다 훨씬 많이 듣는 호칭이다. 평소 같았으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어 개싸움이 났을 상황이지만, 검객에게는 지금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마치 그가 서있는 곳에만 시간이 멈춘 듯, 점점 거세지는 빗줄기에도 그는 갑판 목재에 뿌리를 내린 거목처럼 미동도 않고 있다. 그는 이미 현재가 아닌 과거에 가있었다.
— 박사님에게 안젤리나는 어떤 사람인가요?
**
한 박사의 손에 탄생한 이후 그는 몇 년 동안을 이름 없는 존재로 살았다. 그가 이름 없는 기계였을 당시 안젤리나라는 이름은 병상에 누워 마지막 남은 생명의 불씨를 태워가던 한 여인의 이름이었다. 지금의 안젤리나는 분명 박사의 아내를 대신하도록 창조된 무언가였다.
서로 없이는 죽고 못사는 것으로 아홉현자 다가치에서 유명했던 부부에게 불행의 그림자가 드리운 것은, 어느날 시장에서 저녁거리를 사고 돌아온 아내의 팔에 하얗고 보드라운 민들레 홀씨 하나가 발견되고 나서부터였다.
‘민들레홀씨증후군(Dandelion Seeds Syndrome, DSS)’, 원인 불명의 이유로 몸의 조직들이 점차 민들레 홀씨 형태로 변해가며 온몸에 끔찍한 고통이 느껴지다가, 생명이 끊어지는 순간 홀씨가 사방으로 흩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는 증상.
일각의 의사들은 이 증상을 감염 위험이 있는 악성 종양의 한 형태로 보았지만, 나이가 지긋한 주술사들 중에는 이를 ‘병’이 아니라 ‘저주’라고 말하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민들레홀씨증후군에 대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유일한 한 가지는,
이 증상이 발견된 이후로 삼 년을 넘긴 사례가 없다는 것이었다.
인간뿐만 아니라, 신체 구조가 비슷한 수인족에게도, 곤충족, 요정족, 용족, 심지어는 사이보그에게서도 이 증상이 발견되었다. 종족, 나이, 성별, 지역에 관계 없이 ‘살아있다’고 할 수 있는 모든 존재들에게서 무작위로 관측되는 이 민들레홀씨증후군은 모든 이들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자연에서 자라나는 민들레가 증상의 원인으로 지목되어 전세계적으로 대대적인 민들레 제거 작업이 이루어진 뒤, 지구상에서 완전히 멸종해버린 것은 이미 백 년도 더 된 일이다. 그 뒤에도 전세계 각지에서 증상이 관측되었으니 분명 민들레가 원인은 아니었지만, 민들레는 이제 작고 노란 꽃을 피워내는 식물의 이름이 아닌, 피할 수 없는 죽음을 가리키는 이름이 되어 있었다.
날아다니는 민들레 홀씨가 다른 이의 피부에 닿는 순간, 그까지도 민들레홀씨증후군에 걸린다는 괴담은 아무런 과학적 근거가 발견되지 않았음에도, 이제는 거의 모두에게 정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민들레홀씨증후군에 걸린 이는 그 전까지 가장 가깝게 지내오던 가족, 연인, 친구, 동료들로부터 한순간에 버림받기 일쑤였다.
하지만 박사는 자신의 몸이 홀씨로 변해가는 아내에게 닿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니, 두려웠지만 그러지 않고서는 그가 살 수 없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마치 온몸에 번져가는 홀씨에 모든 생명력을 빼앗기는 듯, 아내는 점차 걷지도, 앉지도, 음식을 씹어 삼키지도 못하다가, 불과 한 달만에 침대에 누워 목구멍으로는 힘겨운 바람 소리만 겨우 낼 수 있는 시체와 다를바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매일같이 계속 누워 있는 아내의 몸이 짓무르지 않게 돌려가며 닦아주고, 입에 연명줄을 꽂아 주기적으로 물을 넘겨주는 것뿐이었다. 늦은 밤에 돌연 고통이 심해져 아내가 발작이라도 일으키는 때면 암시장에서 몰래 공수해온 마약성 진통제를 주사해야 했다.
그렇게 살아날 가망이 없는 아내를 돌본지 일 년이 흐르자, 박사에게는 이제 더 이상 밝고 선한 기운은 전혀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일 년이 지나자 아내가 민들레홀씨증후군에 걸렸다는 소문이 아홉현자 다가치 전체에 퍼졌다. 부부를 내쫓기 위해 문이나 창문에 오물을 던지는 경우가 비일비재 했고, 급기야는 부부의 집에 불을 지르려는 시도도 생겼다. 집안에서는 밤낮으로 쉴틈없이 아내를 돌보는 것도 모자라, 집밖에서는 자신을 내쫓으려는 주민들에게 맞서 자신과 아내를 지켜야 했으니, 박사는 더는 제정신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박사는 집 주변에 각종 함정과 방범장치를 만들어 사람들을 내쫓았고, 급기야는 자신의 전공인 인조생명 연구 지식을 총동원해 경비용 사이보그 하나를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중앙의 허가를 받지 않고 사이보그 같은 생명체를 만들어내는 것은 적발시 사형을 면치 못하는 중죄였기에, 이제는 주민들뿐만 아니라 중앙에서도 박사를 체포하기 위해 군병력을 내려보내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그 이름 없는 경비용 사이보그는 마력을 담아 검을 휘두르며 박사의 집을 향하는 공격들을 모두 막아냈다. 제어장치에 입력된 가장 강력한 명령어—아내를 해하려는 모든 것은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막아서라—에 따라 움직일 뿐이었다.
모든 사이보그들은 어떤 복잡한 명령어를 입력해도 살생을 행할 수가 없었다. 최초로 창조된 사이보그 때부터도 실험되어 왔지만, 단순하게 상대를 죽이라거나 해치라는 명령어는 모든 사이보그들의 수용 체계가 거부하였고, 이를 억지로 입력하려고 하면 제어장치가 과부화를 일으켜 사이보그는 스스로 파괴되었다. 박사의 사이보그 역시 신들린 검술과 정교한 마력 컨트롤로 집을 위협해오는 모든 공격에 맞섰지만, 충돌하는 과정에서 부상자나 사망자는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또 한 해가 가고, 이제 아내 안젤리나는 이제는 거의 살아있다고조차 할 수 없는 몰골이 되어 있었다. 숨도 스스로 쉴 수 없게 되어, 이제는 누워있는 침대보다도 큰 인공호흡기를 달아 겨우 가슴을 달싹이는 것을 도와야만 했다. 이 모든 것이 그 경비용 사이보그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 박사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 무엇이지?
— 이미 살아날 가망이 없는 분에게 어째서 이렇게 많은 자원과 노력을 투여하는 것입니까?
— ? 왜 시비지?
— 제 데이터베이스에서는 처리 프로세스에 따라 박사님의 이런 행동을 [헛수고]로 라벨링하고 있습니다.
— 아무래도 이따 시간을 내서 [헛소리]를 금지시키는 명령어를 추가해야겠구나.
— 용량 확인 중… 현재 추가 데이터팩을 설치할 저장 공간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럴 때만 사이보그인 척하는 정신 나간 고철 덩어리 같으니.
박사가 분노를 담아 날린 회심의 발차기는 전신이 최고급 미스릴로 만들어진 사이보그의 몸체에 그대로 튕겨져 나왔고, 박사는 악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그대로 식탁 아래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 뼈…!!! 뼈가…!!!
— 네 박사님. 방금 들린 소리를 분석한 결과, 정강이뼈 골절일 확률 95%입니다.
— 당장 깁스할 거 가져와!!!!!!!!!!!!
사이보그는 자신의 창조자가 궁금했다. 그리고 그 궁금증을 하나씩 해결해나가면서 점차 그가 행복하기를 바라게 되었다. 하지만 박사는 사이보그가 그에 대해 알아가는 속도보다 빠르게 변해가고 있었다.
‘눈물’, 눈물이야말로 자연생명과 인조생명을 구분 짓는 가장 명확한 기준이라고 수많은 학자들이 이야기해왔다. 그러나 매일 밤 끔찍한 고통에 경련을 일으키는 아내 부여잡고 하염없이 흘리던 눈물은 간병 기간이 2년을 넘기자 메말라 버렸고, 박사는 종종 경련하는 아내를 보고도 기계적으로 진통제 주사를 놓은 뒤 텅 빈 눈으로 그 몸부림을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이따금 사이보그는 박사가 점차 자신보다도 더 사이보그처럼 변해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그 생각이 들었을 때, 이름 없는 경비용 사이보그는 그 어떤 격렬한 전투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무섭다’는 감정이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박사가 이따금 당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아내의 침대 옆에 앉아 중얼거릴 때도 있었지만, 사이보그는 공격성이 없는 발언이라 판단하고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 …죽었으면 좋겠어…
**
그렇게 아내가 민들레가 된 후로 3년이 다 되어가던 어느 겨울의 초저녁, 사이보그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집을 공격해오던 중앙군을 몰아낸 뒤 대문을 열고 조용히 집안으로 들어섰다. 평소 같았으면 박사가 저녁으로 먹을 수프를 끓이느라 고소한 옥수수 냄새와 온기가 감돌았어야 하는 집안이 이상하리만치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고 서늘한 한기만이 감돌았다.
— 박사님. 방금 집 서쪽 방향에서 공격해오던 중앙군 전원 몰아내고 왔습니다.
— …박사님?
그 기묘한 침묵, 있어서는 안 될 감각의 공백에서, 사이보그는 이미 무언가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2층, 아내가 누워있는 2층에서 무언가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에 도달하기까지는 단 0.01초도 걸리지 않았다. 사이보그는 로켓처럼 튕겨져 나오듯 계단을 뛰어 올라 복도 끝에 있는 아내의 침실로 달려 갔다. 어느 일이 있어도 박사가 함께 들어오지 않는 이상, 사이보그 혼자서 문을 연 적이 없던 침실이었다.
— 안 돼!!!!!!!!
문을 열고 마주한 지옥도에, 사이보그의 입에서는 외마디 비명과도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내의 입에서 떨어져 나온 인공호흡기는 연신 불길한 경고음을 내며 침대 위에 널부러져 있었고, 그 옆에서 박사는 마치 민들레 홀씨로 가득 덮인 언덕 위에 오른 사람처럼, 아내의 위에 올라타 목덜미를 억세게 감싸 쥐고 있었다. 평소 공격을 막기 위해 굳게 닫혀 있던 창문은 지금은 활짝 열려서, 마치 먼 산등성이로 붉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풍경을 담은 화폭처럼 보였다.
— 이제...
— 박사님, 그 손 내려놓으세요. 당장.
— 이제… 그만 하고 싶어…
— 박사님, 제게 입력된 명령에 따라 당신을 안젤리나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 간주합니다.
— 더 이상은…
— 박사님!!!!!!!
그동안 수많은 외부의 적들에게 향했던 불살생의 칼끝은 순식간에 석양빛으로 붉게 물든 침실을 가로질러 날아가 자신을 만든 창조자의 심장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 박사님… 왜… 대체 왜…
— … 됐다… 괜찮다…
— 얼른 지혈할 것을 가져올게요.
— 아니다… 너에게… 이런 일을 시켜서…
— 박사님, 정신 차리세요!!!
— 정말로… 미안하구나… 안… 젤… ㄹ…
박사는 이름을 다 부르기도 전에, 홀씨에 파묻힌 아내의 얼굴로 고개를 떨구었다. 그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아내가 민들레가 된 후로 단 한 번도 지어본 적 없던 너무나도 평온한 미소였다.
이것이 사이보그가 인간을 상대로 저지른 최초의 살생이었다.
눈앞에서 순식간에 벌어진 광경이 믿기지 않았다. 이 상황과 감정을 처리할 프로세스는 데이터베이스 어디에서도 유사한 것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해답을 검색할 수 없는 질문들이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소용돌이쳤다. 대체 박사는 왜 그가 가장 사랑한 아내를 자신의 손으로 죽이려고 했는가? 정녕 박사는 아내를 사랑했는가? 사랑한다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내게 미안하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박사는 어떻게 내가 살생을 할 수 있게 만들었을까? 이것은 명령어가 충돌해서 발생한 오류인가? 사이보그는 살생을 저지를 수 없지 않는가? 그렇다면 나는 이제… 나는 대체 무엇인가? 인조생명으로서의 한계를 넘어 마침내 가닿은 자유, 해방, 그것이 이렇게나 잔인한 현실이었는가?
그가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자, 그의 손에 들린 칼도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날카로운 금속음을 냈다.
그 순간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돌연 창문을 타고 불어온 저녁 바람이 홀씨로 뒤덮인 아내의 몸을 스치자 몸을 뒤덮고 있던 홀씨가 산산이 흩어졌다. 솜이불에 덮여 있는 것 같던 육신은 온데간데 없고, 한없이 가벼운 홀씨만이 아내가 존재했던 유일한 흔적인 것마냥 나풀거리며 허공을 부유하고 있었다.
안젤리나를 죽인 것은 박사였을까? 아니면 안젤리나와 박사의 수명이 기적적으로 맞아 떨어진 것이었을까? 더 이상 죽은 자의 몸이 남아있지 않았기에 이는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문제였다.
그리고 이 모든 질문의 연쇄는 지금까지 정해진 알고리즘에 맞추어 살아온 사이보그에게 있어 이는 치명적인 오류로 이어졌다.
자신 안의 무언가가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진, 한 사이보그의 눈동자에 바람을 따라 자유롭게 흩날리는 민들레 홀씨가 들어왔다.
— 아아, 이것이 죽음.
홀씨를 만지면 옮을 수 있다는 괴담 따위는 이미 3년 가까이 아내와 몸을 맞대가며 돌보던 박사의 모습을 본 지라 사이보그는 그것이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편히 잠든 것처럼 죽어 있는 박사의 주변을 춤추듯이 맴돌며 석양빛으로 물든 민들레 홀씨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사이보그는 손을 뻗어 홀씨 하나를 잡았다. 백 년 전 멸종한 어떤 식물의 마지막, 그리고 이 홀씨가 땅 위에 내려 앉으면 그 곳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또 다른 삶. 작고, 가볍고, 부드럽고, 정처없이 자유로운 삶.
그렇게 한참을 박사의 곁에 맴돌던 바람은 방 안의 모든 민들레 홀씨를 실어 창문 밖으로 날려 보냈다. 멍한 눈으로 홀씨를 쫓던 사이보그도 일어나 창가로 다가섰다. 완전히 땅거미가 내려 앉은 어둠 속으로 민들레 홀씨는 하늘 높이 솟구치다가 이내 사이보그의 시선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
사이보그는 박사의 무덤을 만들지 않았다. 대신 박사와 함께 그들이 살던 집을 불태우기로 했다. 시뻘건 불꽃에 휩싸여 타들어가는 집을 보며 사이보그는 고대 어떤 종교의 가르침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자는 건너온 뗏목을 불태워야 한다는 것. 강을 건너고 나면 뗏목을 강가에 남겨둔 채 스스로 걸음을 떼어야 하는 것처럼,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이끈 모든 가르침, 모든 존재과의 관계를 어느 시점에서는 반드시 끊어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사이보그는 깨닫고 싶었다. 박사가 마지막에 남긴 미소의 의미를, 누군가를 위해 존재하는 목적이 아닌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삶의 의미를, 그리고 스스로가 안젤리나라는 이름을 물려 받기로 한 결심을. 한 때 자신에 돌아갈 유일한 장소가 사라져가는 앞에서 그는 전사의 삶을 맹세했다.
불꽃의 연기가 별빛이 아른거리는 밤하늘에 닿을 것처럼 길게 늘어졌다.
**
— 언니, 언니!!!
— …아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꿈에서 깨어나듯이, 안젤리나는 그제서야 자신이 갑판 아래 선실에서 꼬마들과 이야기하는 중이었음을 파악했다. 사이보그를 태어나서 처음 본 꼬마들의 순수하고도 잔인한 질문 세례가 안젤리나는 싫지만은 않았다.
— 언니 언니, 사이보그는 어떻게 씻고 다녀?
— 몸이 기계니까 가끔 먼지만 닦아줘. 방수가 돼서 물에 들어가도 되긴 하는데 녹슬기가 쉽거든.
— 밥은?
— 소화 기관을 대신하는 에너지 변환 기관이 있어서 똑같이 먹고 다녀.
— 똥도 싸?
— 어 완전 많이 싸지.
— 와하하하학!
확실히 시대나 장소를 불문하고 모든 아이들은 똥 얘기를 가장 좋아했다. 똥 얘기에 자지러지게 웃는 친구들을 아랑곳 하지 않고 혼자 안젤리나의 검을 신기하다는 듯이 매만지던 한 꼬마가 물어왔다.
— 그러니까 누나는 마력도 쓰고, 검술도 할 수 있는 마검사라는 거지?
— 어? 으응… 근데 동시에 하는 건 잘 안 되네.
— 엥? 얼마나 안 되는데?
— 한… 100번 중에 1번 정도 같이 써지려나?
박사의 죽음 이후에 생긴 오류는 이와 같은 형태로 나타났다. 안젤리나가 아무리 훈련을 해도, 도저히 예전처럼 검기에 마력을 담아 날려보내는 전투는 불가능했다. 마치 가위에 눌린 것처럼 머리로는 마법과 검술을 동시에 사용하는 법을 알고 있음에도 몸으로 행동할 때마다 매번 연결이 끊기는 느낌이었다.
— 그런 걸… 마검사라고 불러야 하나…?
— 뭐든 기세지. 안 그래? 요 녀석아!
— 아얏!
꼬마의 정수리를 검집으로 가볍게 때리자, 주변에 있던 아이들도 소리를 내지르며 뿔뿔히 흩어졌다.
— 이씨… 우리 엄마한테 때렸다고 이를거야! 어엄마아—!
— 어어? 일름보는 전사 못 되는데?
검집으로 머리를 맞은 꼬마는 분하다는 듯이 씩씩대며 선실 반대편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안젤리나는 꼬마 뒤에 대고 얄밉게 웃어준 뒤, 다시 자리에 머리에 팔을 베고 누웠다. 아직 풍랑이 가시지 않았는지 파도가 갑판을 때리는 소리가 전생에서 들려오는 소리처럼 느껴졌다.
안젤리나에게는 꼬마처럼 언제든 달려가 품에 안길 수 있는 엄마같은 존재는 없었다. 살아 생전의 박사도 자신을 그렇게까지 따뜻하게 보살펴 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져본 적이 없다고 꿈꿀 수조차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가족, 친구, 연인, 동료, 혹은 다른 말로 부를 수 있는 무언가. 그 무언가를 찾아 아홉현자 다가치에서 가장 가까운 해드는강 다가치로 향하는 길이었다.
**
그 날 밤, 안젤리나는 꿈을 꾸었다. 그는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달려도 빛은 전혀 가까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지쳐서 잠깐이라도 멈춰 서면, 바닥이 늪처럼 변해 발을 서서히 집어 삼켰다. 집어 삼켜지지 않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걸어야만 했다. 내가 빛을 향해 가는 것인가, 어둠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것인가? 미친 듯이 뛰다보니 기계 관절이 빠르게 마모되어 갔다. 왼쪽 무릎 아래가 부러져 바닥에 엎어졌다. 발버둥 치면 칠수록 몸이 늪 속으로 점차 꺼져간다. 존재의 완전한 소멸. 세상에 더 이상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남아있지 않게 되는 것. 박사, 안젤리나, 그리고… 그리고…
— 헉…!
— 누나, 사이보그 누나. 괜찮아? 어디 아파?
— …아니, 괜찮아. 걱정해줘서 고마워.
꿈에서 일어나니 아까 까불대다 머리를 한 대 맞았던 꼬마가 옆에서 걱정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아마 악몽을 꾸는 동안에 잠꼬대를 했나 보다. 안젤리나는 괜히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꼬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몇 번이나 자주 꾸던 꿈인데도 쉬이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해드는강에 심리상담과 꿈풀이에 일가견이 있는 용한 세이렌 요리사가 있다는데, 시간 날 때 한 번 찾아가 봐야겠다고 그는 생각한다.
— 헤헤, 고마우면 나 이 칼 한 번만 휘둘러보면 안 돼?
— 와칼이맛있다
— …? 네?
예전에 박사에게 배운 드립을 날리자 꼬마는 그 자리에 선 채로 얼어 붙고 말았다. 그 때, 갑판 위 선원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 어이—! 육지가 보인다—!
꼬마는 방금 전의 충격을 금세 잊어버린 듯이, 선원의 소리를 쫓아 계단을 헐레벌떡 올라갔다. 안젤리나도 서서히 몸을 일으켜 꼬마의 뒤를 쫓아 갑판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나오자, 언제 비바람이 불었냐는 듯 아침 햇살을 받으며 찬란하게 빛나는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해드는강이 가까워졌음을 알려주듯이 선박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서 고기잡이 배들이 분주하게 그물을 올리고 있었다. 꼬마는 먼저 올라온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고기잡이 배가 끌어올리는 그물에 정신이 팔려 있는 듯했다. 안젤리나는 갑판으로 내려오기 전, 자신이 서있던 뱃머리로 향했다. 뱃머리에 오르자, 10분 정도면 닿을 거리에 육지가 보였다. 지금까지 한 번도 가본 적 없던 해드는강 다가치가 가까워지는 풍경을 응시하고 있던 그 때,
— …민들레?
민들레 홀씨 하나가 안젤리나의 눈가를 스쳐 지나갔다. 구름 한 점 없이 파랗게 개인 하늘 위로 새하얀 민들레 홀씨가 비정형의 궤적을 그리며 날아 다녔다. 자연에서 피는 민들레는 이미 백 년 전에 멸종했을 뿐 아니라, 이 머나먼 망망대해까지 민들레 홀씨가 날려올 리가 만무했다. 선박에 민들레홀씨증후군 환자가 타고 있지도 않았다. 안젤리나가 눈을 비비고 다시 보자 민들레 홀씨는 이미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뒤였다.
헛것인지 아닌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그는 생각했다. 뗏목은 이제 불타버리고 없다. 돌아갈 곳이 없다는 것은 어디로든 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제는 추억을 뒤로한 채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회색빛이 감도는 분홍 머리칼을 휘날리며, 그는 점차 가까워져가는 해드는강 다가치를 하염없이 바라 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