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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드는강 다가치: 서막

시간은 나선을 그리며 유유히 흐른니, 과거는 다시 오지 않고, 미래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나선의 한복판에 다같이 선 우리는 이 곳을 세계라고 부른다. 세계는 우리가 지금 이곳에 만들어 나가는 것일지어니. 그러니 나의 동료들이여, 경외심과 함께 걸음을 내딛어라. 걸음이 닿는 곳에 새로운 세계가 피어날 것이다. - 해드는강 다가치 인근 숲 속 주인 없는 석비
일어났구나. 앗, 아직 움직이지는 마.
겉으로는 다친 정도가 심해보이지는 않아도, 머리부터 떨어졌으니 내부에 출혈이 있거나, 신경계에 손상이 있을 수 있어.
내 친구가 훈련장에 가다가 갑자기 강에 뚝 떨어진 너를 건져서 여기로 데리고 왔대. 제 때 건지지 않았더라면, 정말 큰일이 났을 지도 몰라. 그 아이? 아 지금 바쁜 일이 있다면서 바로 가버렸어. 바쁜 일이라고 해봐야 매일같이 하는 ‘통나무 쪼개기’ 훈련이겠지만. 에휴… 그래도 마침 운좋게 내가 오늘 휴일이고 해서 이렇게 너를 돌볼 여유가 생겼어.
괜찮아. 여기는 안전한 곳이니까. 진정될 때까지 충분히 쉬어도 돼.
음… 안전이라… 생각해보니 아직 여기가 어딘지 전혀 모르는 너에게 이 곳을 안전한 곳이라 말하는 것은 좀 어색한 말일 수는 있겠네.
그럼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여기는 적어도 타인을 해하려는 사람들이 모인 곳은 아니야. 넉넉하지는 않지만, 너가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먹을 수 있는 적당량의 음식과 깨끗한 물이 있는 곳이고. 오래 머물다보면 조금 불편한 점이 있을 수 있지만, 그 불편한 점을 고쳐나가려는 의지를 너가 먼저 보이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함께 바꿔나갈 사람들이 있는 곳.
그런 곳이면 너의 마음이 조금은 놓일 수 있을까?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괜찮아. 천천히 생각해.
우리가 아프고 다친 사람을 돌보는 데에 있어 너가 누군지 아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
기억이라는 건 원래 자주 잊혀지고, 또 원하지 않았던 것이 불쑥 떠오를 때도 있는 제멋대로인 거잖아? 언젠가 기억이 다시 되돌아오면 그 때 너의 이야기를 들려줘도 늦지 않아.
물론 사실 너의 이야기가 궁금하기도 해. 하지만 그것이 너가 누군지를 설명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야.
여기에서는 뭐든 재촉하는 법이 없지. 우리는 모두 같은 시간을 살지 않아. 누구는 물총새처럼 빠르게 나이들어 가기도 하고, 누구는 달팽이처럼 아주 느긋하게 나이들어 가지. 어제는 홀로 괴로운 과거의 상념에 사로잡혀 하루가 길게 느껴질 수도 있고, 오늘은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보내며 하루가 빠르게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
시간은 결코 절대적이지 않아. 여기서 늦는다는 것을 이야기할 절대적인 기준 따위는 없어. 어제 하지 못한 건 오늘 하면 돼. 오늘 하지 못한 건 내일이 기다리고 있어. 그러다 영영 하지 못하게 되면 어떡하냐고? 괜찮아. 그 동안 너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니까.
나도 모르게 말이 길어졌네. 그래. 어디서부터 설명하는 게 좋을까? 혹시 저기 회색 벽돌길이 시작되는 곳 옆에 세워진 큰 팻말이 보여?
앗! 미안, 굳이 몸을 일으키지 않는 게 좋은데, 내 정신 좀 봐.
보인다고? 휴 다행이다. 시신경이 다친 건 아닌가보네. 그렇지? 그 팻말에 적혀있는대로, ‘해드는강’이 여기 다가치의 이름이야. 군주의 성 남서쪽에 위치한, 바다와 맞닿은 작은 다가치지.
‘다가치’가 뭐냐고? 이런. 두부 손상에 의한 단기기억상실이 의심되긴 했는데, 너 어쩌면 정말 이 나라 사람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종족은 인간… 은 맞는 건가…? 그럼 이제부터 내가 알고 있는 걸 최대한 설명해줄게.
다른 나라에서는 다가치와 비슷한 형태를 ‘마을’이라는 부르는 곳도 있다고는 해. 하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아. 내가 직접 가본 건 아니고, 친구 중에 각국을 돌아다니며 여러 정보를 접하고 다니는 친구가 있어서 귓동냥으로 들은 거지만 말이야. 혹시 다다라고 유명한 세이렌 요리사 알아? 옛날에 이 나라에서 가장 큰 요리 대회에서 수상도 했는데, 시상대에서 국가 대신 군주를 처단하자는 혁명가를 부르는 바람에 수상이 취소되고 그 이후로 군주가 더 이상 요리 대회를 열지 않게 되었다는 그 전설적인 일화의 주인공. 그게 바로 다다야.
나도 모르게 이야기가 계속 옆으로 새네. 아무튼 간에, 이 나라에는 네 군데의 다가치가 퍼져있고, 그 중 해드는강은 세 번째로 만들어진 다가치야.
우선 가장 먼저 만들어진 ‘아홉현자’ 다가치는 마물을 비롯해 각종 모험 지식에 대한 자료가 가장 많이 축적되어 있는 곳이야. 그래서 입성 시험을 치르지 않는 다른 삶을 살기를 원하는 자들은 누구나 한 번쯤은 아홉현자 다가치에 방문해서 지식을 전수받고는 해. 나도 아홉현자 다가치에서 처음으로 장사와 같이 여러 기술을 배울 수 있었지.
그 다음으로 만들어진 ‘바위산길’ 다가치는 산세가 험한 곳에 위치해 있어서 마물의 습격을 상대적으로 덜 받는 지역이야. 그럼에도 그 다가치 주민들은 매일같이 바위가 솟은 산봉우리를 마치 평지처럼 뛰어다니며, 마물과 중앙군의 침략을 대비할 수 있도록 매일같이 체력을 단련하는 것으로 유명해. 바위가 많아서 광물과 원석 자원도 풍부하지.
‘서리초원’ 다가치는 지금 막 활발하게 새로 만들어지고 있는 다가치야. 숲이 무성한 지역이라 자연히 약초가 많아서, 약초학에 관심이 있는 주로 힐러나 마법사 계열의 용사들이 요새 들어 자주 방문하는 다가치라나봐. 다만 그 지식을 다가치에 도로 환원하지 않고, 입성 시험을 위한 디딤돌로 삼으려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요새 골치가 아픈가봐.
마지막으로 ‘해드는강’ 다가치는…
특출난 뭔가는 없어도 그래서 아무래도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곳이라 생각해.
해드는강 다가치가 세워지던 때가 벌써 몇 해 전인데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 새로 다가치가 만들어진다고 해서 와봤는데 웬걸 사방에 모래벌판 뿐인 거야. 게다가 조금이라도 비가 오는 날에는 강이 곧바로 범람해서, 겨우 세워둔 건물 골조들이 모조리 바다로 떠내려 가는 모습을 그저 지켜보고만 있어야 했지. 우리 미니돼지 종족 대대로 내려오는 이야기 중에, 늑대가 와서 무너뜨리려고 해도 절대 무너지지 않는 튼튼한 벽돌집을 지은 조상님 이야기가 있거든? 그 조상님도 이런 조건에서 집을 짓기는 어려웠을 거야.
뭐? 그 이야기는 안다고? 신기하네. 이건 미니돼지 수인족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도 잘 모르는 이야기던데, 넌 정말 어디서 온 거니?
그래도 해드는강에 모인 존재들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이 살아갈 터전을 일궜어. 강물이 범람하지 않는 지역을 찾아 집을 지었고, 밀과 쌀 농사를 짓는 대신 바닷바람에 강한 보리나 구황작물을 대신 심었어. 이따끔 중앙군이 견제 공격을 해올 때면 평소 다른 일에 종사하던 사람들도 무기를 집어들고 달려가서는 거칠게 항전했지. 너가 지금 누워 있는 침대 맡에 높인 작은 활 보여? 네 팔 하나 길이 정도밖에 안 되지만, 나는 그보다 빠르게 연달아 화살을 쏠 수 있는 활을 본 적이 없어. 물론 주인인 나의 실력이 출중해서 잘 쓰이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엣헴.
흠흠. 이 미지근한 반응은 뭐지? 아무튼 중앙은 마물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마물보다도 더 지긋지긋한 놈들이야.
‘입성 시험’이 뭔지는 알고 있니? 이 왕국은 건국될 때부터 입성 시험이라는 것을 두고, 주기적으로 전국 단위의 시험을 개최해.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나 조건도 특별히 정해져 있지 않지만, 시험은 오직 일 년에 한 번 뿐이야. 곤충족이나 플로라(꽃 요정족) 같은 단명종은 정말 한 번 기회를 놓치면 죽을 때까지 다시는 찾아오지 않으니 이들은 더 절박할 수밖에 없고. 그리고 이 입성 시험을 통과해서 군주의 성에 들어가, ‘중앙’의 신분을 얻으면 그는 평생 동안 부와 명예를 보장받을 수 있다고들 해. 이건 소문만은 아니야. 실제로 이 나라 대부분의 영토들이 군주의 명의로 중앙에 귀속되어 있고, 여기에서 나오는 곡식, 약초, 광물같은 자원까지도 중앙이 소유권을 갖는다고 해도 무방해. 막대한 자원이 전부 시험을 통과한 소수에게 집중된다고 생각해봐. 정말 평생 동안 다 쓰지도 못할, 지나치게 많은 부를 보장받게 되는 거지.
그리고 입성 시험에 모든 생을 바쳤다가, 번번히 낙방을 하며, 타락하고, 각 종족의 윤리를 상실한 채, 다른 존재들을 향한 공격성만을 띄게 된 것이, 바로 우리가 ‘마물’이라고 부르는 것들이야. 그래서 마물은 종족을 가리지 않고 나올 수 있어. 인간족도, 수인족도, 용족이나 요정족도 정신 차리고 살지 않으면 마물이 되어 있기 십상이지. 안타깝게도 한 번 마물이 되어버리고 난 뒤에 다시 종족 윤리를 되찾고 돌아온 사례는 아직까지는 없다고 해. 요즘 들어 종종 특정 종족이 마물을 많이 배출한다는 이상한 찌라시성 신문 기사나 연구가 나오기도 하지만, 번지르르한 말로 포장해 봐야 그건 그저 종족 차별에 지나지 않아.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이유가 어찌 되었든 그래도 마물이 우리를 공격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어. 게다가 최근 들어 심상치 않게 마물이 늘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래서 몇 해 전부터 중앙에서 마물의 개체 수를 관리하겠다고 지역마다 별도의 지하 공간을 만들어 놨어. 너가 빠졌다는 강 너머에도 마침 그 지하공간이 있는데, 우리는 그걸 ‘던전’이라고 불러. 던전 안에서는 마물들끼리 서로를 죽이기도 하지만 활발히 번식하기도 해서, 자주 던전 밖으로 마물이 넘쳐 나오기도 한다나봐. 다행히 해드는강 주변에는 누가 심어둔 것도 아닌데 마물이 싫어하는 향을 풍기는 약초가 잔뜩 자라고 있어서 다행히 별도의 방어막을 칠 필요는 없었지만, 이 속도로 마물이 늘어난다면 어쩌면 여기도 곧 안전한 곳은 아니게 될 거야. 아까 전 내가 이곳이 안전하다고 이야기한 것과는 되게 모순된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 것 같아서 미안.
그리고 지금 막 생각난 건데, 지금 이 왕국을 통치하는 군주도 과거에는 혁명군 소속의 유명한 용사였다고 해. 하지만 반란을 일으켜 선대 군주를 처형한 뒤에, 그가 군주의 자리에 오르고 나니, 혁명군 시절 때 가졌던 이념은 온데 간데 없고, 부와 명예를 부풀리고자 온 나라의 자원을 독차지하려는 탐욕만이 남게 되었다고 해. 그는 원래부터 그랬던 걸까, 아니면 그 자리에 오르는 존재들은 전부 그렇게 되어 버리는 걸까?
그렇다면 그것은 마물이 되는 것과 다를 것이 뭐지?
앗 너무 분위기가 어두워졌나? 미안미안. 평소에 이런 이야기를 할 사람이 잘 없다보니 나도 모르게 몰입했나봐.
그래도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왠지 너도 눈치 챘을 거야. 그렇지? 다가치는 많은 이들이 그냥 자연스레 모여 들어 만들어진 곳이 아니야. 그래서 마을과는 다른 거고.
다가치에 모인 우리에게는 목표가 있어.
이 왕국의 입성 시험이 만들어내는 결과는 단 두 가지야. 타락한 마물이 되거나, 아니면 부와 명예를 차지하고 왕국의 끄나풀로 살거나. 우리는 앞의 것을 곧잘 ‘실패’라고 부르고, 뒤의 것은 ‘성공’이라고 부르지. 우리는 다가치를 원점으로, 이 견고한 지형을 파괴할 거야. 우리는 성공과 실패로 양분되지 않는 그 나머지의 것들, 호명되지 않은 삶을 생각해. 우리는 중앙이 되지 않아. 그렇다고 마물이 되지도 않아. 우리의 투쟁은 하나의 주장으로 깔끔하게 정리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설득력이 없지도 않지.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모험이자, 살아있음 그 자체여야만 해.
그러니 다시 한 번 정식으로 인사할게.
내 이름은 누누.
혁명의 씨앗이 되는 곳,
해드는강 다가치에 온 것을 환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