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주사위꾼이다. 때로는 이기고, 때로는 진다. 나는 당신과 같다. 혹은 조금 덜 할지도… 나는 우물가에서 태어났다. 세 그루 외로운 나무 곁에서, 외로운 수녀들처럼, 축하도 없이, 산파도 없이, 그렇게 태어난 나는 우연히 이름 지어졌고, 우연히 한 가족에 속하게 되었으며, 그 가족의 생김새와 성품과, 병들까지 물려받았다.
— <The Dice Player>, 마흐무드 다르위시(1924-2008, 팔레스타인의 시인)
시원한 산들바람이 수천 개의 푸른 나뭇잎 사이를 스치는 소리에 꺼누는 침대에서 눈을 떴다. 몸을 일으켜 창밖을 내다보니 앙상한 나뭇가지와 겨울 숲의 적막함만 가득했다. ‘잘못 들은 걸까’, 잠시 생각에 잠겨 창가에 턱을 괴자 먼 곳 어딘가에서 까마귀가 우는 소리만 아득히 들려왔다.
**
던전 근처 인적이 드문 숲 한 가운데에 버려진 인간 아이들이 모여 사는 양옥에서 꺼누는 ‘대장’이라고 불렸다. 몇 해 전 이 곳에서 보육원을 운영하던 원장이 사채업자를 피해 야반도주를 한 뒤로, 사실상 꺼누가 어린이들의 보호자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는 사채업자들뿐만 아니라 험난한 숲의 환경으로부터도 아이들을 지켜내었고, 아이들은 기꺼이 꺼누를 대장으로 믿고 따랐다.
낮에는 양옥에서 같이 사는 아이들에게 숲에서의 생존술과 단검술을 가르쳤고, 저녁에는 해드는강 주점 한 구석을 빌려 딜러로 일하며 푼돈을 벌어오는 일상이 이어졌다. 밤 늦게 일이 끝나고 양옥으로 돌아올 때면, 언제나 숲의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좀비 같은 마물들이 꺼누를 공격해왔다. 처음에는 이들 하나 하나와 단도로 맞섰지만, 그런 수고를 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뒤부터는 민첩한 몸놀림으로 여유롭게 마물의 공격을 피하며 밤길을 다녔다.
— 쿠오오오오오!!!!
— (휙) 가만 있자… (휙) 오늘 텔라가 장 봐오라고 했던 것 중에… (휘휙) 어라, 내가 계란을 샀던가? (휙)
던전 근처 숲에는 움직임이 느린 좀비부터, 빠른 웨어울프까지 다양한 마물이 서식하고 있었지만, 꺼누는 숲에 살며 이 모두에게서 피할 수 있는 재주를 자연스레 터득하게 된 것이다. 어젯밤에도 거미형 마물 무리가 나무 위에서 한꺼번에 덮쳐왔지만, 갈지자로 요리조리 마물을 피하며 무사히 양옥에 돌아온 그였다.
**
— 요즘 들어 숲에 마물이 부쩍 많아진 것 같은데, 무슨 일일까…
점심 식사를 준비하러 아랫층으로 내려가자, 몇몇 아이들이 이미 거실 소파에 둘러 앉아 계단으로 내려오는 꺼누를 올려다 보았다.
— 대장, 배고파.
— 대장, 뭐 먹을 거야?
— 이따 계란볶음밥 해줄게. 텔라는?
— 저기.
아이들이 일제히 가리킨 앞마당으로 나가자, 텔라와 초코가 대화하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 어제 집 앞에서 뭘 봤다고?
— 아르르르르르… 아르르르르르르…
— 에이 설마. 잘못 본 거겠지.
— 아르르르르르… 왈왈왈!!!
— 아니 뭐 그렇다고 널 안 믿는다는 건 아닌데…
— 왈!!! (와작)
— 아악! 아파아파. 아프다고!
텔라에게는 동물과 대화하고, 먼 곳에 있는 동물을 불러내 자신의 말을 따르게 할 능력이 있다. 꺼누는 텔라에게 몇 년 동안이나 단검술이나 손기술을 가르치려고 했지만, 도저히 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전투력은 거의 0에 가까웠지만, 그는 대신 숲의 야생 동물들에게 보호 받으며 이 험난한 환경에서도 안전한 일상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초코는 텔라가 어릴 적 숲 속에서 길을 잃었을 때 만나 친해진 동갑내기 치와와였다. 서로에게 가족과도 같은 사이였지만, 이따금 이렇게 싸울 때면 언제나 지는 쪽은 텔라였다.
꺼누는 텔라의 팔꿈치를 물고 놓아주지 않는 초코를 간신히 떼어놓고는 무슨 일인지 물었다.
— 휴… 초코가 어제 숲에서 엄청 큰 와이번이 기어다니는 것을 봤다는데 믿을 수가 있어야지. 와이번은 동쪽 마력의 샘 근처에만 서식할 텐데 무슨 수로 여기까지 오겠어?
— 와이번? 와이번이 기어다니나?
— 왈 왈! 왈!
— 날개 한 쪽이 잘려나가 있었대. 그 와중에 되게 구체적이네… 진짠가?
— 왕!!! (와작)
— 아악! 아까 문 데를 또…!! 알겠어 믿을게! 진짜 믿는다고!
꺼누는 또 다시 소란을 피우는 둘을 뒤로 하고는 다시 양옥 안으로 들어왔다. 꺼누는 태어나서 한 번도 용족을 만난 적이 없었다. ‘드래곤’은 용족 중에서도 타 종족과 소통이 가능한 존재로, 이따금 마물에게서 위험에 처한 이가 있으면 대신 마물에 맞서 싸워주기도 하는 친화적인 생명체였다. 거의 대부분의 종족도 그만큼 드래곤에게 우호적인 자세를 보였다. 드래곤 사회 내부적으로도 몇 천 년의 오랜 기간동안 다른 이와의 소통할 언어와 대화법을 개발해오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그리고 이를 개발하지 못한 채, 모든 타 종족은 물론 자신과 같은 같은 용족까지도 공격해오는 용족을 ‘와이번’이라고 불렀다. 이들에게는 소통을 거부한 채 자기만의 세계에 사로잡혀 남은 것이라고는 자신 이외의 모든 것을 향한 공격성밖에 없었다. 숲에 출현한 것이 드래곤이었다면 그나마 안심이었을텐데, 와이번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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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번이 숲속에 출현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 꺼누는 주점에서 일을 하면서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가 않았다.만에 하나 자신이 양옥에서 멀리 나와 있는 지금 시간에 와이번이 양옥을 습격한다면…? 사실 꺼누가 집에 있다고 해도 상황이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꺼누는 연신 심호흡을 하며 마음 속에 피어오르는 불안을 꺼뜨리려고 노력했지만, 이미 한 번 지펴진 불안은 마치 향불과 같아서는 꺼뜨린 뒤에도 은은한 연기와 잔향을 남기고 있었다.
마침 그날따라 주점 안은 한가했다. 평소 하루치 노동이 끝난 뒤 주점에 곧잘 과실주를 마시러 오는 마을의 주정뱅이 아저씨들은 웬일로 보이지 않고, 주점을 채우는 소리는 웬 사이보그와 작은 날개가 달린 인간, 그리고 코볼트가 각자 밀크티 세 잔을 시켜두고는 벌써 세 시간째 할리갈리를 하며 내는 거친 종소리밖에 없었다. 그들은 거의 할리갈리에 자신의 모든 인생을 건 것마냥 자신의 모든 집중력을 게임에 쏟아붓고 있었다.
땡!
— 잠깐. 동작 그만. 방금 너 카드 뒤집을 때, 우리 쪽으로 안 내고 너 쪽으로 냈지.
— 어어? 맞네.
— 아니? 증거 있어? 증거 있냐고?
— 난 너가 카드를 너 쪽으로 뒤집었다는 것에 내 마검술 데이터팩 전부를 걸지.
— 난 내가 결백하다는 것에 가지고 있는 약초와 포션 전부를 걸겠어.
꺼누는 공통점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이들이 어떻게 모여서는, 이렇게 과실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맨정신으로 세 시간째, 그것도 룰이 가장 간단한 게임만 이렇게 하고 있는지 잠시 동안 흥미가 생겼지만, 이내 와이번에 대한 불안에 압도되어 그들에 대한 관심을 거두었다.
— 하… 내일 훈련 가야하니, 여기서 마치고 이만 숙소로 돌아가죠.
— 아, 진짜 훈련 안 하고 있을 때가 이렇게 즐거울 줄이야… 난 그 로잉 훈련만 안 할 수 있으면 뭐든 재밌어. 지금 숨 쉬는 것조차 재밌어.
— 난 힐러 포지션인데 대체 왜 너네랑 같이 훈련을 받아야 하냐고…
— 개리씨가 말했잖아요, 루덴. 힐러라도 기초 체력을 길러두지 않으면 모험 중에 큰 약점이 되어서 파티 전체가 위험해질 수 있다고요.
꺼누는 그제서야 이들이 요즘 해드는강에 머물며, 주민들의 소일거리를 돕고, 드워프에게 지옥 훈련을 받는다는 모험가 파티라는 것을 알아 차렸다. ‘모험가라…’ 자신도 한 때 멀리 모험을 떠나고 싶었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당장 자신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양옥의 아이들을 지키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이미 부모에게 한 번 버림 받은 아픔을 가진 아이들에게 두 번씩이나 버림 받는 경험을 만들어줄 수는 없었다.
— 잘 놀다 갑니다! 마신 건 여기 돌려드리면 될까요?
— 네… 감사합니…
꺼누는 다 마신 밀크티 잔을 쟁반에 담아온 날개 인간에게서 쟁반을 받아들다가 손이 겹쳤다. 그 찰나의 순간, 곧바로 ‘이 사람… 강하다…!’는 직감이 꺼누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손기술에 능한 꺼누는 그의 손이 분명 평범한 인간의 손이 아니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린 것이었다.
꺼누는 주점 밖을 나서는 셋의 뒷모습을 얼빠진 채로 바라보다가, 이들 정도면 혹시 와이번을 무찌를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 황급히 입고 있던 앞치마를 풀었다.
— 사장님, 저 오늘은 급하게 가볼 데가 있어서요! 먼저 퇴근합니다. 죄송해요—!
— 그려, 가봐. 몇 시간 일찍 간다고 가게가 내일 당장 망하는 것도 아닌디.
— 윽…
스켈레톤 주점 사장은 항상 꺼누의 갑작스러운 부탁을 거절하는 법이 없을 만큼 선량했지만, 다소 가학적인 유머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꺼누가 주점 문을 나서자,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굼벵이처럼 걸어가는 셋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진짜… 가야 하는 걸까? 정말? 그냥 당장 내일 훈련 대신 던전 가는 건 어떻게 생각해? 나름 훈련의 성과를 확인할 수도 있고?
— 안젤리나씨 혼자만의 전투력만 생각하면 안 되죠. 저희 연계가 아직 많이 서투르다고 개리씨가 말하기도 했고…
— 저기 잠깐, 형씨들!
꺼누가 뒤에서 다급하게 외치자, 셋은 일제히 소리가 난 뒤를 돌아보았다.
— 어, 아까 주점에서 일하던 분… 저희 뭐 놓고 갔나요?
— 아니. 그건 아니고… 모험가 파티 맞지? 마물하고 전투도 하는.
뭔가 어떻게든 훈련을 쨀 구실을 생각하던 안젤리나의 두 눈이 반짝였다. 그 동안 주민들이 시키는 잡일과 고된 훈련만 반복하다가, 이제서야 모험가 파티가 받을 법한 의뢰의 냄새를 맡고는, 안젤리나는 꺼누의 두 손을 부여잡고 말했다.
— 네네. 잘 찾아오셨습니다. 저희가 바로 그 모험가 파티입니다. 파티 이름은… 어… 아 아직 안 정해졌지만, 아무튼 원래 알려지지 않은 맛집이 진짜 맛집이고, 무명 고수가 진짜 고수라는 말이 있죠.
— 그런 것 치고는 우리가 하도 난리를 치고 다녀서 해드는강에서 아는 놈들 꽤 많… 으읍
안젤리나는 설명을 덧붙이려던 루덴의 주둥아리를 거머쥐고는 꺼누의 마음이 행여 바뀔까 열심히 자기 PR을 하기 시작했다. 태래는 옆에서 이 모든 광경을 흐린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 설명은 됐어.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내가 살고 있는 숲속에 최근 와이번 하나가 출몰하는 것 같아. 그 와이번을 잡아주었으면 해.
— 숲에 산다고? 그 던전 주변 숲?
— 아, 누누한테 들은 적이 있어요. 버려진 아이들의 모여 산다는 숲의 양옥…. 그럼 당신이 바로 그 손기술이 좋다는 ‘대장’이겠군요.
— 아까 보니까, 게임 좋아하지? 내가 지금 하는 게임에서 너네가 지면 내 의뢰를 공짜로 들어줘. 대신 너네가 이기면, 내가 들어줄 수 있는 선에서 너희의 부탁 하나를 들어줄게.
서로를 바라보는 셋을 앞에 두고, 꺼누는 자신이 가지고 다니는 가죽 주머니의 끈을 풀고, 불투명한 컵 세 개와 주사위 하나를 꺼냈다. 그러고는 길가에 있던 나무 테이블에 이들을 올려두고는 앞에 놓인 의자에 걸터 앉았다.
— 총 다섯 판이야. 여기 사이보그 형씨가 대표로 참여하는 거지? 다섯 판 중에 세 판 넘게 어느 컵에 주사위가 있는지 맞추기만 하면 돼.
— 푸흡. 이건 너무 쉽잖아…? 그냥 이런 내기 안 해도 우리가 들어줄 의향은…
— 과연 그럴까? 시작한다.
— … 헉…
기계 동체 시력을 이용하면 누워서 떡먹기 일 거라 생각한 예측과는 달리, 안젤리나는 자신의 눈 앞에서 컵이 마치 분신술을 쓴 닌자마냥 현란하게 뒤섞이고 있는 광경에 입이 떡 벌어졌다.
— 자. 셋 중 어느 쪽?
— 자… 잠깐 잠깐. 여기 가운데…!
— 자, 한 판은 내가 이겼어.
주사위는 오른쪽에 있는 컵에서 데구르르 굴러 나왔다. 꺼누는 슬며시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바로 시작된 두 번째 판에서도 안젤리나가 가리킨 컵이 아닌, 바로 옆에 있는 컵에서 주사위가 굴러 나왔다.
안젤리나는 승부욕에 타올랐지만, 분명 이 속도라면 자신이 아무리 동체 시력 기능을 업데이트해도 결코 맞출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태래도 순식간에 지나간 이 두 판이 믿기지가 않다는 듯이 컵을 이리저리 만져보고 괜히 컵 안을 들여다 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리저리 봐도 그것은 그저 평범한 컵이 었다. 아까부터 루덴만이 침착하게 꺼누를 쳐다볼 뿐이었다.
— 자 다음 판에도 내가 이기면 곧바로 내 의뢰 공짜로 들어주기야.
— 쳇… 대체 어떻게 한 거지…? 이걸 어떻게 맞춰…?
— (안젤리나. 쟤 눈. 눈을 봐.)
루덴은 안젤리나의 어깨를 툭툭 친 뒤 귓속말을 했다. ‘눈? 컵을 보기도 바쁜 와중에 눈을 봐서 뭘 어쩌라는 걸까?’ 생각과 동시에, 꺼누의 컵은 이미 섞이고 있었다. 귓속말에 정신이 팔려 조금이라도 남아있던 맞출 수 있는 기회가 허무하게 날아갔다는 생각에 안젤리나는 루덴이 원망스러웠다. 이윽고 컵이 일제히 멈추고 선택의 순간이 찾아왔다.
— 자 어느 쪽?
안젤리나는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고는 고개를 푹 수그린 뒤, 승리의 확신에 찬 꺼누의 표정을 올려다 보았다. ‘어…?’ 그 순간 안젤리나는 아까 루덴이 한 귓속말의 의미를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 … 가운데.
— 쳇. 빨리 끝낼 수 있었는데, 운이 좋았군.
안젤리나가 정확하게 가리킨 컵에서 주사위가 굴러 나왔다. 그리고 네 번째 판에도, 마지막 다섯번째 판에도, 안젤리나는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자처럼 거침없이 주사위가 있는 컵을 지목했다.
— 제길… 어떻게 된 일이지…?
— 너 세게 나온 것하곤 다르게 생각보다 되게 투명한 친구구나…?
— 뭐?
— 너가 섞는 것만 보면 정말 아무리 봐도 모르겠어. 그건 확실히 대단해. 하지만…
안젤리나 대신 루덴이 말을 이었다.
— 너 주사위가 들어있는 컵을 계속 쳐다보고 있잖아.
— 윽…
노름에 관한 손기술에 대해서는 양옥에서는 물론이고, 해드는강 전체를 통틀어 따라갈 자가 없던 꺼누였지만, 노름을 진행하는 자신의 표정이 관찰 당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꺼누는 한숨을 푹 쉬고는 말을 이었다.
— 좋아… 부탁 하나를 들어주도록 하지.
— 우리 부탁은 내일 와이번이 있는 곳으로 우리를 데려가 달라는 거야.
— 뭐?
— 아까 말했잖아. 우리는 그냥 너의 의뢰가 재미있어 보여서 하려는 거야. 값이야 당장이 아니라 나중에 천천히 치르면 되는 거고.
꺼누는 놀란 눈으로 안젤리나를 쳐다보았다. 안젤리나는 당연하다는 표정을 짓고는, 벌써 내일 와이번을 잡으러 갈 생각에 루덴에게 토벌에 필요한 포션을 잔뜩 만들어 놓으라고 닦달하기 시작했다. 질린다는 표정으로 응수하는 루덴 옆에는, 태래가 멋쩍게 웃으며 서있었다.
— 사실 문제가 하나 있어. 나도 그 와이번이 어딨는지는 몰라.
— …뭐어——???
**
물기 하나 없이 잘게 바스라지는 낙엽을 밟으며, 한 무리가 안개가 자욱한 오후 나절의 숲속을 가로질러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선두에는 치와와 한 마리가 용맹하게 분주하게 냄새를 맡으며 무리를 이끌고, 다섯 명이 그 뒤를 따랐다. 어젯밤 의뢰를 받아들인 파티는 꺼누가 걱정한 와이번이 이 둥싯둥싯 걷는 조그마한 치와와가 본 게 다라는 것이 살짝 못미덥기는 했다. 이른 아침에 훈련장에 개리에게 오늘은 와이번을 잡는 의뢰가 들어와서 훈련이 어려울 것 같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하니, 개리는 곧바로 걱정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 조심해. 자신의 영역을 벗어난 존재만큼 예민하고 공격적인 존재도 없어. 게다가 그 상대가 와이번이면… 개인기와 연계 모든 것에 능숙한 모험가 파티원 대여섯명이 달려들어도 격파가 어려울 수도 있어. 긴장 단단히 하고 가도록.
안젤리나는 속으로 자신이 오래도록 갈고 닦아온 전투 실력을 믿어주지 않는 개리가 살짝 원망스러웠지만, 한편으로 와이번을 잡아와서 이 훈련 교관 앞에 자신의 실력을 똑똑히 증명해보이겠다는 기대도 어느 정도 품고 있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한시라도 빨리 숲속에서 와이번을 찾아내야 했지만 말이다.
— 진짜 있는 거 맞아? 치와와가 잘못 본 건 아니고?
— 으르르르르르…
— 이봐요, 말 조심하세요 코볼트씨. 초코는 당신같이 어중간한 생명체들하고는 다르게 몇 배나 뛰어난 감각을 가진 전설의 치와와니까요.
— 아아, 다들 그만 싸워. 일단 이 근방에 마물이 내뿜는 숨의 공기 중 농도가 짙지는 않아. 와이번 정도면 분명 평범한 인간도 알아차릴만큼의 위화감이 있어야 하는데, 여긴 그냥 평범한 숲처럼 느껴져.
— 평범하고 고요해요… 정말 이상할 정도로요… 아무리 겨울 숲속이라고 해도 이렇게 생명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 건 좀…
안젤리나가 공기 농도를 계산할 동안, 태래는 자신의 등에 매고 있던 방패를 빼들어 한 손에 굳게 움켜 쥐었다. 꺼누는 며칠 전부터 자신의 방 창가에서 느끼던 위화감에 대해 생각했다. 겨울의 숲속은 그렇게까지 고요한 적이 없었다. 겨울잠을 자지 않는 동물이더라도, 멧돼지가 킁킁대는 소리, 청설모가 나뭇가지를 꺾으며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소리, 순록 무리가 이동하는 소리처럼,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숲은 사시사철 언제나 소리로 가득했다.
그리고 이 사실은 꺼누보다 동물의 생태에 보다 조예가 깊은 텔라가 이미 그의 형제보다 더 일찍 알아차리고 있던 터였다. 독수리나 까마귀도 좀처럼 숲에 내려와 먹이 사냥을 하지 않는 듯 했다. 며칠 전, 우연히 새모이통에 놓인 나무열매를 먹으러 온 동박새에게 요즘 숲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묻자, 동박새는 “좋지 않다”, “하얀 인간들”, “날개”와 같은 말들만 반복하다가 다시 포르르 날아가버리는 것이었다.
자신의 영역을 지키고 있던 동물들이 사라지니, 그 빈 자리를 채우는 것은 마물들이었다. 낙엽 사이에 숨어있던 슬라임이 발목을 휘감아 왔지만, 마물 중에서도 가장 하급 마물인 슬라임은 초코의 발길질만으로도 쉽게 떨어져 나가 버리고는 했다. 그렇게 그들은 어느새 던전 입구로 보이는 커다란 바위 동굴 근처에 다다랐다. 소문으로만 듣던 던전의 바로 앞까지 오니, 마물들의 위압감에 짓눌려 꺼누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 오… 생각보다 으스스한데? 여기가 말로만 듣던 던전인가. 확실히 공기 중 마물의 숨 농도가 진해.
— 그런가봐요. 그래도 입구에 생각보다 뭐가 특별한 게 없네요. 설마 와이번이 던전 안으로 들어가버린 건 아니겠죠?
— 아마 아닐 거야. 예전에 원장이 해준 말로는 던전은 중앙에서 인위적으로 만든 마물 감옥 같은 거라, 자기 같은 일반인이 실수로라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강력한 결계가 쳐져 있다고 했어.
꺼누는 자신과 아이들을 배신한 원장을 증오했지만, 그가 이전에 알려준 지식들로 이렇게 도움을 받는 것 같아 말하면서도 약간 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초코가 앞을 향해 맹렬히 짖으며 동굴 안으로 잽싸게 들어가는 것이었다.
— 왈!!! 왈왈!!!
— 어어 초코 기다려—!! 우리는 던전에 들어가려는 게 아니라, 와이번을 찾으러 온 거잖아.
— 안 그래도 난 짐도 많아서 무거워 죽겠는데…
여전히 텔라와 초코가 미덥지 못한 루덴이 조용히 궁시렁거리며 뒤를 따랐다. 그 뒤를 안젤리나가 헛웃음을 지으며 따라 갔고, 마지막으로 태래와 꺼누가 한숨을 푹 내쉬며 동굴 안으로 들어서려다, 한 걸음 앞장 서던 태래가 돌연 우뚝 멈춰서는 바람에 꺼누는 그의 날개에 얼굴을 파묻고 말았다.
— 와씨, 깜짝이야. 갑자기 멈춰서면 어떡해.
— 꺼누씨, 방금 전에 하신 말씀… 뭐라고 하셨죠?
— 어? 원장이 한 말? 던전에는 강력한 결계가 쳐져 있다고…
— 초코나 텔라씨가 결계를 해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나요?
— …어?
— …그럼 여기는 어디죠?
그 순간, 꺼누의 귓가에 그가 며칠 전 창가에서 들었던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시원한 산들바람이 수천 개의 푸른 나뭇잎을 사이를 스치는 소리.
쏴아아아아아— 쏴아아아아아아—
그 때 굴 안 쪽에서 텔라의 다급한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 다들 밖으로 도망쳐—! 와이번이다—!!!
꺼누는 어째서 자신이 그 중요한 이야기를 지금에서야 기억해 낸 것일까 짧게 탄식했다. 이 또한 언젠가 원장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자신의 기척을 지우고 먹잇감을 유인하기 위해, 먹잇감이 느끼기에 가장 자연스럽고 편안한 소리를 흉내낸다는 용의 이야기를.
**
죽을 힘을 다해 굴에서 달려 나오는 일행 뒤로, 고목나무 껍질을 연상시키는 짙은 갈색의 거친 외피를 가진 와이번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가 동굴 천장에 닿고도 남을 만큼 거대한 마물은 한쪽 날개가 잘려나가 있었다. 이 때문에 날 수가 없었지만, 와이번은 나는 것보다 오히려 더 빠른 속도로 무리를 쫓아 동굴 속에서 기어나오고 있었다.
— 샤아아아악—!!!!
— 다들 밖으로 나왔지? 전투 태세를 갖춰!
안젤리나의 지시에 따라 전투를 담당하기로 한 안젤리나, 태래, 그리고 꺼누가 자세를 낮추었다. 루덴은 큰 나무 뒤에 숨어서 포션 병에 회복 주문을 걸어 두고 있었다. 텔라도 여전히 와이번을 향해 맹렬하게 짖는 초코를 간신히 품에 안고 루덴의 옆에 몸을 숨겼다.
굴에서 나온 와이번은 남은 한쪽 날개를 크게 펼쳐 흔들며 안젤리나 일행을 위협했다. 몇 번의 날갯짓만으로 소용돌이가 형성되어 꺼누는 서있기조차 힘들었다. 그 동안 양옥 근처 숲에서 마주한 마물과는 차원이 다른 강함을 느끼고는 꺼누는 정면전으로는 결코 승산이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는 주변에 이용 가능한 지형지물은 없는지 재빨리 나무 위로 올라갔다.
힌편 안젤리나는 침착하게 와이번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거대한 덩치만큼이나 파워는 엄청났지만, 그만큼 공격 속도는 떨어진다는 판단에 선제공격을 빠르게 퍼붓고자 한 것이었다. 안젤리나는 지난밤 와이번에 대한 정보를 업데이트 하며 얻은, 모든 용족은 목 아래에 거꾸로 난 비늘인 ‘역린’을 부수면 무력화된다는 정보를 생각해 냈다. 하지만 알려진 약점이 확실한 만큼이나 용들은 역린을 사수하는 데에 필사적이었다. 게다가 와이번의 목 근처에 가까이 다가간다는 것은 그대로 자신를 먹이로 갖다 바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안젤리나는 와이번의 앞에 놓여 있던 바위를 밟고 높게 도약해 그대로 와이번의 등에 칼을 휘둘렀다. 그러나 칼은 비늘에 흠집 하나 내지 못한 채 그대로 튕겨져 나왔다.
— 쳇, 일반적인 공격으로는 승산이 없겠군…
— 형씨, 오른쪽에… 피해—!!!
— …앗!
카앙——!
안젤리나는 나무 위에서 들려온 꺼누의 외침을 듣고 오른쪽을 바라보자 육중한 꼬리가 자신을 향해 날아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뒤따라온 태래가 방패로 막아주지 않았다라면 분명 치명상을 입었을 공격이었다. 안젤리나는 그제서야 개리의 걱정이 괜한 것이 아니었음을 실감했다. 분명 공격 속도가 떨어진다고 해서 빈틈이 잘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안젤리나가 아무리 속사포로 공격을 퍼부어도, 와이번의 반격은 거의 동시에 들어왔다. 안젤리나가 속공을 퍼붓자 와이번은 더 격렬하게 저항하며 주변의 나무들에 몸을 거세게 부딪혔다.
— 으악!
나무 위에서 동태를 살피던 꺼누는 와이번이 준 충격으로 인해 떨어질 뻔하다가 간신히 칡덩굴을 부여 잡고는 간신히 다시 나무 위로 올라왔다. 안젤리나만이 이 파티에서 유일하게 와이번에게 유효타를 넣을 수 있는 멤버였지만, 그는 전투가 시작된 후 십분 가까이 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와이번에게 유효타를 넣지 못하고 있었다. 승산이 없을 거라 판단한 꺼누는 저 마검사와 방패병이 전투에 집중한 틈을 타 텔라와 초코만 데리고 몰래 빠져나오는 것이 생존에 더 유리할 거라 판단했다. 꺼누는 조심스레 나무 아래로 내려와 그들이 숨어있던 큰 나무 뒤로 갔다. 하지만 당황스럽게도 거기에 있어야 했던 셋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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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그들은 와이번이 모습을 드러낸 동굴 안으로 다시 들어가 몸을 피하고 있던 차였다. 루덴은 괜히 조약돌을 걷어차며 투덜거렸다.
— 쯧… 마음에 들지 않지만 지금 당장은 사는 게 우선이니까…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은 여기가 가장 안전할 거야.
— 일리 있는 말이에요. 그래도 너무 깊숙히 들어가지 말고 되도록이면 동굴 초입에 있는 게… 앗, 이게 뭐죠?
— 멈춰. 조심해!
텔라가 발을 찬 곳에는 주사기와 주삿바늘 수십 개가 바닥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행여 텔라가 주삿바늘에 찔릴까 루덴은 텔라를 거칠게 끌어냈다. 그러고는 자신이 조심스레 아직 약물이 다 주사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주사기 하나를 들어 조심스레 들어올렸다. 옅은 갈색의 액체가 땅바닥에 주르륵 흐르며 끔찍한 썩은내를 풍겼다.
— 윽, 이건 분명… ‘독말풀’ 냄새야. 평범한 인간이면 잎사귀 하나만으로도 치사량에 도달할 수 있는 맹독성 식물이지. 보통은 아주 극소량만을 추출해서 마취나 진통 목적으로 사용하곤 하는데, 이렇게 많은 독말풀 주사는 대체 어디서 난 거지? 설마…
— 왕왕!!!
— 아앗 초코 잠깐만—! 바닥 함부로 밟으면 안 돼!
초코는 텔라의 품에서 뛰어나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멈춰서는 바닥에 있던 무언가를 열심히 물어 뜯기 시작했다. 텔라와 루덴이 다가간 곳에는 이미 옷의 형체를 겨우 알아볼 정도로 심하게 찢긴 흰색 가운이 널부러져 있었다. 그 흰색 가운 뒤에는 중앙의 마크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순간 루덴은 자신이 해드는강 골목의 한 폐건물 지하에서 목격한 밀거래 현장에서 연구관리국 소속 과학자가 입고 있던 가운과 동일한 가운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 왈! 왈왈왈왈!!! 왈왈!!!
— 지금 초코 말로는… 이 옷을 입은 사람들이 분명 와이번에게 마취제를 주입하고, 날개를 잘랐을 거라고 하는군요.
— 어쩐지… 이건 중앙의 연구관리국 소속 과학자들의 가운이야. 그렇다면 저 와이번만 혼자 서식지도 아닌 이 숲속에 나타난 것도 설명이 되는 것 같군 그래.
— …와이번을 이 숲에 납치해와서는 독말풀로 마취시킨 뒤에 한쪽 날개를 잘라냈다는 설명인가요?
— 그래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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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싸움이 장기전으로 이어질수록 안젤리나와 태래의 형세는 더욱 불리해졌다. 그 순간 치열한 전투를 뚫고 숲속 어딘가에서 희미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 ♬~ ♪~ ♬~ ♪♬~ ♪~
구슬픈 노래인지, 활기찬 노래인지, 샤람이 부르는 건지, 짐승이 부르는 건지, 음정이나 박자, 빠르기 무엇하나 일관되지 않은 기이한 노래였다. ‘이 노랫소리는 뭐지?’라고 인지하자마자 일순간 안젤리나와 태래는 그 자리에서 땅에 단단히 뿌리를 내린 듯 옴짝달싹 하지 못하게 되었다. 전투를 피해 근처 나무들 뒤를 확인하며 텔라와 초코를 찾아다니던 꺼누 역시 노래를 인지하고는 그 자리에서 멈춰 버렸다.
— 이건…!
— 큰일이에요. 아무래도 스턴(stun) 디버프에 걸린 것 같습니다…!
— (큭… 와이번에게 아군이 있었나?! 방심했군…)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스턴에 걸려버린 셋의 시선은 일제히 맹렬히 공격 해오던 와이번을 향했다.
그러자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광경이었다. 와이번도 공격을 일순간 멈추고는 머리를 양옆으로 거세게 흔들며 괴로워하는 중이었다. 그는 서둘러 노래를 멈추기 위해 노래가 흘러나오는 방향으로 잽싸게 기어 나갔다. 그러고는 거대한 나무 하나에 온몸을 세게 부딪혀 줄기를 끊어버렸다.
나무가 넘어감과 동시에 모두를 괴롭히던 노래 소리가 일순간 멈추었다. 스턴에 걸린 안젤리나가 간신히 고개를 돌린 곳에는 긴 치마를 입은 여자가 나무 아래에 쓰러져 있었다. 기이한 노래 가락의 발원지가 바로 이 소녀인 것이 확실했다. 태래도 같은 곳을 바라보며, ‘대체 얼마나 강력한 디버프길래, 이렇게 타종족 언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와이번까지도 괴로워 하게 만든 걸까…’ 생각을 했다.
꺼누도 이윽고 정신을 차려 와이번 아래 의식 잃은 소녀를 발견하였다.
— 루… 루나???
— 뭐야. 아는 사람이야?
— 그게 말하자면 복잡…
그 때 의식을 잃은 소녀에게서 등을 돌려 와이번이 다시 안젤리나, 태래, 꺼누 이 세 명이 있는 곳으로 재빨리 기어오기 시작했다. 와이번의 입가에는 찐득한 거품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 ‘헬 브레스(Hell Breath)’…! 이젠 정말 끝났어.
— 제길… 여기까지인가…!
헬 브레스는 전신에 있는 지방질을 다량으로 연소시킨 뒤, 입으로 5,000℃에 달하는 불꽃을 내뿜어 단 몇 초만에 모든 생명체를 흔적도 없이 증발시킬 수 있는 용족의 가장 흉악한 공격 기술이었다. 불꽃을 방출하기 전 입가에 지방질 액체 거품이 부글부글 끓는다는 특징이 있고, 한 번 방출한 뒤에는 오랜 기간 가사 상태에 들어갈 만큼 스스로에게도 돌아오는 리스크가 큰 기술이기도 했다. 와이번은 이제 이 길고 긴 전투를 끝낼 마음을 먹은 것이었다.
디버프는 서서히 풀리고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다리까지 풀리기 위한 시간은, 와이번이 다가오는 속도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했다. 어느 새 셋 앞에 도착한 와이번이 이들을 향해 입을 쩍 벌렸다. 가운데에는 시뻘건 불꽃이 일렁이며 둥글게 맺히는 것이 보였다. 안젤리나는 자신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떠오를 것 같은 장면은 분명 집을 불태우고 결의를 다지던 그 때일 거라 생각했지만, 막상 그 순간이 되니 떠오르는 것이라고는 어젯밤 할리갈리를 하며 동료들과 옥신각신하던 그 장면이었다. 정말 폼 안 나는 마지막 생각이 아닐 수가 없었다.
— 안 돼…!!!
그러고는 온 세상이 고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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