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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궁극의 아이돌: 반인반수 음유시인, 루나의 이야기

미처 이루지 못한 사랑을 노래여 이 온 마음을 다해 불러야 할 노래여 잃어버린 양심의 소리를 찾아 노래여 오 노래여 청춘의 힘을 다해 노래여 날아가라 — <노래여 날아가라>, 윤미진(꽃다지)
타고난 재능이 없을지라도 열심히 노력하면 뭐든 해낼 수 있다…고 분명 그렇게 믿어왔다.
방금 전 내가 죽기 전까지는 말이다.
**
— 루나 이 녀석! 공부할 시간에 또 노래 연습을…!
몰래 노래 연습을 할 때면 엄마는 내가 어디에 있든 나를 귀신 같이 찾아냈다.
우리 자매들 중 가장 막내인 나는 위로 두 명의 언니들이 있는데, 둘 모두 꽤 이른 나이에 입성 시험에 통과해서 중앙의 관리로 일하고 있다. 중앙에서 번 돈을 송금해오는 사람이 둘이나 있어서, 우리 모녀는 꽤나 부유한 삶을 살 수 있는데도, 어쩐지 엄마는 여전히 숲에 사는 삶을 고집하고 있었다. 숲속 외진 곳에 으리으리한 대저택이 있는 것을 수상하게 생각하는 해드는강 주민들도 있었지만, 태어날 때부터 이곳에 살았던 나는 그다지 불편함을 느끼지는 못했다. 유일하게 마음이 안 좋을 때는, 아빠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모험 중 실종된 뒤로, 사실상 과부 취급을 받으며 사는 우리 엄마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이 돌 때였다. 가끔 시장에서 장을 보러 갈 때, 뒤에서 ‘여자 혼자 살면서 어디서 그 많은 돈이 났을까’ 하는 소리를 지껄이는 놈들을 볼 때마다 속에 천불이 났지만, 그럴 때마다 엄마는 내 손을 꼭 잡아주며 ‘상대할 필요가 없다’는 눈길을 보내왔다. 나는 그런 엄마가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 그 눈길에 담긴 외롭게 버텨온 세월이 느껴져서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엄마는 나에게 언제나 꼬리를 가릴 수 있도록 긴 치마만을 입혔다. 상체는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하체는 동물의 형태를 한 반인반수족은 이렇게 옷으로 가릴 수만 있다면 심지어 서로 간에도 반인반수라는 것을 쉽사리 눈치 채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 종족은 서로 모임을 갖거나 같이 뭉쳐서 무언가를 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감출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평범한 인간처럼 살 수 있었기에 반인반수라는 것을 드러내는 경우라고는 거의 피폐한 삶을 살아가는 거리의 부랑자들뿐이었다. 행실이 안 좋은 자신들 때문에 반인반수족에 대한 인식이 더 안 좋아지고, 이것이 종족 전체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을까? 나처럼 원대한 꿈과 계획이 있는 사람에게 대단한 실례라고 생각한다.
나의 꿈은 이 왕국의 ‘아이돌’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 모두의 우상인 아이돌말이다. 입성 시험은 일 년에 한 번씩 열리지만 궁정악사만을 뽑기 위한 시험은 5년에 한 번씩 열리고, 그마저도 정말 극소수만을 뽑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우리 언니들도 악기에 재능이 있어 한 때 궁정악사 특별 입성 시험을 잠깐동안 준비한 적이 있었지만, 이내 포기하고는 일반 시험을 치러서, 일반 행정업무를 보는 보직으로 성에 들어갈 수 있었다. 물론 세계는 넓고, 나보다 잘하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다. 하지만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한다면 그 노력은 분명 보상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노래 부르는 것도 정말 좋아하고, 리라를 연주하는 것도 정말 좋아한다. 다섯 살 때 엄마가 알려준 뒤로,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리라를 연주해왔다. 그렇다고 객관적으로 볼 때 썩 그렇게 연주를 잘하는 편은 아닐지라도, 내가 연주하고 싶은 곡을 연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나는 만족한다.
그리고 노래… 노래에 대해서는 조금 할 말이 많다. 군주의 자리는 맨 처음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인간족이 맡고 있기 때문에, 궁정악사가 (주로 연회에서) 부르는 노래 또한 인간족의 발음과 화성 체계를 따랐다. 반인반수들의 발성기관이 미세하게 인간의 그것과는 달라서, 반인반수는 언제부턴가 노래를 부르지 않게 되었다. 노래를 부르면 곧바로 반인반수임이 들통나기 때문이었다. 입성 시험에서 평가하는 곡도 전부 인간에게 맞춰진 노래다 보니, 나는 그들과 비교해 훨씬 더 뒤에 놓인 출발선에 선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쉽게 포기한다면 이 루나님이 아니다. ‘노력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는 내 좌우명처럼, 나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특별 입성 시험에 합격해 궁정의 아이돌이 되고자 하는 꿈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치른 두 번의 시험 모두 낙방했지만! 그래도! 그래도!!!
— 루나야… 내가 너를 벌써 10년도 넘게 가르쳐 왔다만, 이렇게 노래 실력이 늘지 않는 경우도 난생 처음이구나. 너가 연습을 열심히 한다는 것도 선생님이 다 알아… 하지만… 우선 이게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인 거 알지? 너는 합격할 가망이 없어. 이게 막 종족 차이 때문이고 뭐고를 다 떠나서 네 실력만 놓고 볼 때 하는 말이야. 이제부터 입시반에서 취미반으로 전반해서 음악은 취미로 하는 건 어떨까? 입시반 친구들은 잘하는 애들은 1년, 아니 1개월도 채 안 돼서 바로 합격할 정도의 수준이 되는데… 선생님도 정말 안타까워서 그래. 루나야, 어머님도 계속 말씀하시지 않아? 선생님만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거, 너도 알지?
…아냐! 아냐아냐아냐아냐! 그래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긍정의 힘! 아이돌이 되려면 이런 혹평 같은 것도 잘 버텨낼 수 있는 정신력이 필수지. 시련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나는 분명 해낼 수…
— 이번 주부터 음악 교습 선생님 말고, 입성시험 사회-정치 교과목 담당하시는 선생님이 오실 거다.
— 네???!!!
— 선생님한테 들었잖아? 잘 될 가능성이 없는 곳에 엄마도 헛돈 쓰고 싶지 않아. 그리고, 거의 10년이나 너가 하고 싶은 거 하게 해줬는데 이제 엄마 말도 좀 들어야겠다는 생각은 안 드니? 그리고 우리 반인반수들이 얼마나 노래를 조심해야 하는지, 너도 충분히 알고 있잖아.
— …알아요. 아는데요. 제가 언제 엄마 말을 안 들었는데요?
— 아니 얘가… 이제는 반항까지…
— …죄송해요. 잠깐 밖에 좀 나갔다 올게요.
— 너! 거기 당장 안 서면 당분간 밥 없는 줄…
쾅—!
**
아 정말——! 뭘 그렇게 나보고 아네 마네 그러는 거야———! 알아. 다 안다고. 재능 없는 것도 알고, 가망 없는 것도 다 안다. 세상에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사람이 또 있겠냐고.
난 지금 나만의 비밀 아지트로 가는 중이다. 던전 근처 숲이라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이 없어서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가기 가장 좋은 곳. 밤에는 마물들 때문에 위험하지만, 낮에는 슬라임 말고는 특별히 강한 마물도 나오지 않는 그런 곳이다. 아, 역시나 오늘도 아무도 없구나. 이 대왕참나무에는 정확하게 내가 들어가 앉을 수 있는 틈이 나있어서, 여기에 들어가 있으면 인간은 물론 마물도 나를 쉽게 찾을 수가 없다. 아, 딱 한 명이 있구나. 이 비밀 아지트를 찾아낸 딱 한 사람. 이름이 꺼누… 라고 했었나…?
그 애가 여기에 찾아온 이유도 정말 인상적이어서 아직도 기억이 난다. ‘언제부턴가 숲 어딘가에 노래를 부르는 귀신이 나타나서 그 노래를 세 번 듣는 사람은 얼마 못가 죽는다’는 소리가 보육원 아이들 사이에 돌아서 대장인 자기가 그게 사실인지 확인하러 왔다고 했다. 물론… 나보고도 조심하라고 한 걸 보면, 그 노래를 부르는 귀신이 나라는 건 들키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 뒤에도 그 애는 몇 번 이 아지트를 찾아왔다. 그 때마다 노래 연습을 멈췄어야 해서 그 애가 찾아오는 것이 그리 달갑지는 않았지만, 와서는 아이들끼리 싸운 이야기, 동물과 이야기할 수 있다는 친구 이야기 같이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들려 줘서 나름 재미는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원장이 야반도주를 했다며 이제는 자기가 여기 찾아올 시간이 없을 거라고 말해준 뒤로 그 애는 정말 이 곳에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다. 아무렴 어떤가. 덕분에 노래 연습할 시간도 확보할 수 있어서 나에게는 잘 된 일이지 싶다. 그리고 내가 반인반수라는 걸 들켰으면 그 애도 나한테 그렇게 살갑게 대해 주지도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생각이 많아지니까 기분도 덩달아 쳐지는 것 같다. 이런 잡념을 잊기에는 역시 노래 연습이 최고다. 한 번 불러볼까?
— ♪~ ♬~ ♪~
— 삐이이이이이이이잇!!!! (콩)
— 아얏! 아파라… 이게 뭐지. 겨울에 웬 도토리가…?
고개를 올려다 보니 한 다람쥐가 내가 앉아 있던 참나무 위 둥지에서 고개를 내밀고는 한껏 화가 난 표정을 지으며 뭐라뭐라 소리를 지르고 있다. 비록 동물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다람쥐가 나에게 무엇을 이야기하려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시끄러워!!! 잠 좀 자자!!!’ 휴. 내가 노래만 잘 불렀어도 이렇게 다람쥐한테까지 도토리를 맞진 않았겠지. 이제 비밀 아지트에서도 노래 연습을 못하면 어디 가서 노래 연습을 한담.
중얼거리면서 숲속을 걷고 있으니 한 소나무가 눈에 들어 왔다. 소나무 겉에는 찐득한 송진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예전에 노래 선생님께서 귀를 막고 노래를 부르면 남이 듣는 내 목소리를 더 선명하게 모니터링 할 수 있다고 가르쳐준 것이 떠올랐다. 송진을 한 가득 손에 발라서 귓구멍에 펴바르자, 정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서 온 세계에 나 하나만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좋았어. 이대로라면 확실히 내 노래에 뭐가 문제인지를 알 수 있겠군.
— ♬~ ♪~ ♬~ ♪♬~ ♪~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른 채, 얼마나 많은 노래를 불렀는지 모른다. 지난 입성 시험 때 치렀던(그리고 첫 소절만에 심사위원한테 나가라는 소리를 들었던) 곡부터, 해드는강 사람들도 즐겨 부르는 가요까지. 한참을 목청높여 부르고 있던 그 때, 무언가 거대한 그림자가 나를 덮쳐오는 느낌이 들었다. 태양 아래로 구름이 지나가고 있나? …어라?
그리고 나는 무언가 내 머리를 강하게 내려치는 충격을 받고는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
꺼누는 질끈 감았던 눈을 슬며시 떴다. ‘천국인지 지옥인지 모르겠지만 죽어서 오는 곳은 내가 살던 숲이랑 별로 다를 게 없군… 엥?’ 꺼누는 눈앞에 시뻘건 불꽃을 내뿜고 있는 와이번이 마치 그 모습 그대로 박제된 것처럼 가만히 있는 모습을 보고는 뒤로 놀라 바닥에 자빠졌다. 옆을 보니 안젤리나와 태래는 아까 자신처럼 두 눈을 꼭 감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꺼누는 미세하게 떨고 두 용사 앞에 다가가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 이봐, 형씨들…
— 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악——!
— 아니 진정해. 우리 아직 살아있어.
— …어라 정말이네?
둘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번갈아 보고는, 이윽고 뒤에 시간이 멈춰버린 와이번의 모습을 발견했다.
— 이게… 이게 무슨 일이지…?
— 사이보그에, 천사에, 인간…? 무슨 조합인지는 모르겠지만, 너희들은 정말 운이 좋구나.
— 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악——!
— 시끄러우니까 이쪽은 좀 조용히…
— 억… (털썩)
흰자위를 드러내고 말을 걸어오는 소녀를 본 안젤리나가 괴성을 지르자, 소녀는 안젤리나의 뒷목을 가볍게 쳤다. 그러자 안젤리나는 마치 강제 종료 버튼을 누른 컴퓨터처럼 그대로 OFF 상태가 되었다. 태래는 기절한 안젤리나를 부축하고는 믿을 수가 없는 눈으로 소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꺼누는 이 소녀를 분명 알고 있었다. 오래 전 매일같이 참나무 틈 사이에 앉아 있던 이상한 아이 루나, 하지만 지금 꺼누 앞에 있는 존재는 분명 루나와는 다른 존재였다. 태래가 조심스레 물었다.
— 당신은… 누구시죠?
— 나는 음악의 고대신. 이 반인반수족 아이의 몸에 봉인되어 살아가는 중이다. 이 아이가 의식을 잃지 않았더라면 내가 소환되지도 않았을 거고, 너희들은 이 불꽃에 맞아서 그대로 통구이… 아니 잿더미가 되었겠지.
자신을 고대신이라 칭하는 소녀는 멈춰버린 와이번의 헬 브레스를 손가락을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그냥 평범하게 말을 하는 건데도 말소리가 마치 노랫소리처럼 들렸다.
— 나에게는 노래를 통해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공간을 잠시 격리시키는 능력이 있다. 내가 격리시킨 각각의 공간에는 내가 현전할 수도 있고 말야. 또 그 어떤 종족들하고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 이것이 본디 노래가 가진 힘이었어. 옛 시절에 노래는 시대와 종족을 불문하고 모두를 연결할 수 있는 유일한 매개였으니까…
— 저도 이전에 어떤 마도서에서 본 게 기억나요. 한 때 가장 강력했던 고대신이었지만, 노래가 언젠가부터 인간의 전유물로 전락하고 종족 간의 우열을 가르는 기준이 되자, 동력을 잃고 소멸해버렸다는 한 고대신의 이야기를요.
— 넌 다른 천사들과는 달리 예의 바르고 총명하기까지 해. 아주 맘에 드는군. 하지만 너가 말해준 그 이야기의 뒷부분은 잘못 기록되어 있는 듯하구나. 맞아. 나는 한 때 모든 종족의 무한한 믿음과 환희를 양분 삼아 존재하는 가장 강력한 신이었지. 노래가 악하게 사용된 후로 힘을 잃은 것도 맞아. 오로지 인간만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노래 따위는… 불쾌할 뿐이지. 하지만 나는 소멸한 것이 아니라, 배아의 상태로 돌아갔어. 이 배아를 관리하는 이 아이의 어머니 가문 대대로 이어져온 일이었고 말야.
— 그런…
— 자, 너무 한꺼번에 설명하면 머리가 아플테니 이쯤만 이야기해두도록 하지. 지금쯤 와이번 쪽에서도 슬슬 이야기가 마무리 됐을 테고, 이 아이의 의식도 점차 돌아오고 있어. 마지막으로 가기 전에… 거기 인간!
여전히 흰자위를 드러낸 소녀는 태래 뒤에 숨어있던 꺼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 헉… 저요…?
— 그럼 여기에 너 말고 인간이 누가 있겠냐.
— 저는 이 사람이 천사족이라는 것도 방금 알았는데요…
— 쯧, 버릇없게 굴기는… 그런 맹랑한 구석 덕분에 다른 아이들을 지킬 수 있었던 거겠지. 하지만… 이 모든 일을 감당하기에 넌 아직 어려.
— …
— 그러니 하루 빨리 모험을 떠나거라. 이 세계는 널 한가로이 기다려주지 않아. 그럼 나는 이만. 다음 번에 다시 볼 때는 조금 덜 위험한 상황에서 만나자고…
꺼누는 순간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강하고 의젓한 모습을 보여왔던 어린 날들이 떠올라 목이 메었지만, 이내 빠르게 감정을 다시 추스렸다. 둘의 눈앞이 잠시 흐려지더니, 어느새 루나는 둘과 가까운 나무 밑동에 잠든 것처럼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
— 무서워요. 인간들이 제 날개를 잘라 갔어요. 아파요. 너무 아파요… 다들 미워. 미워… 미워…
— 불쌍한 아가… 내가 너였어도 인간들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을 거야.
— 집으로… 집으로 갈래요… 우리 엄마가 보고 싶어요…
— 그래 착하지. 너의 소원을 꼭 들어주마. 잠시 눈 붙이고 일어나면 어느새 집에 도착해 있을 게야.
— …정말요?
— 정말이고 말고. 그 동안 너를 괴롭힌 나쁜 인간들까지도 내가 아주 단단히 혼쭐을 내주마.
— 히히 고마워요… 신님… 정말 고마워요…
눈꺼풀 위로 깊은 잠이 마치 범람하듯 넘친다
잊는다 잊힌다 잊는다
잠든다
꿈조차
없는 잠 ¹⁾
**
— 으윽… 뭐지… 꿈을 꾼 건가…?
— 그건 아니지만… 설명하기 좀 복잡하니 그런 걸로 해두죠.
— 아 맞다! 와이번!!! 와이번은 어떻게 됐지?!!
정신을 차린 안젤리나는 곧바로 경계 태세를 갖추고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주변에 처참하게 꺾이고 부러진 나무들만이 와이번과의 격렬한 전투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흔적이었다. 뒤이어 루나도 귀에서 송진 덩어리를 빼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 보았다.
— 여긴… 당신들은 누구죠…? 엇…
— 어… 안녕? 오랜만…
오래전 만났던 소년을 마주하고 두 눈이 휘둥그레진 루나에게 꺼누는 멋쩍게 인사를 건넸다. 와이번이 나온 동굴에서는 루덴과 텔라, 그리고 초코가 모습을 드러냈다.
— 어이——! 다들 무사한 거지?!! 여차하면 나 혼자 튈려고 했는데 용케 살아남았네——!
— 대단해요! 와이번을 잡은 건가요? 주변에 시체는 없는 것 같은데, 혹시 도망간 건가요?
— 어…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 왈!!! 왈왈왈왈!!!
꺼누가 말을 이으려던 그 때, 일행 뒤에서 땅에 코를 박고 열심히 냄새를 맡던 초코가 우렁차게 짖는 소리가 들렸다. 텔라는 초코가 무언가를 발견했다고 말했다며, 일행을 데리고 초코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여린 나뭇잎을 닮은 연두색의 알 하나가 놓여 있었다. 텔라는 알을 줍고는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 이건… 동물의 알처럼 생겼는데… 처음 보는 알이야.
— 앗 혹시… 그 와이번의…
루덴이 놀라며 운을 떼자 다들 일제히 루덴을 바라보았다. 루덴은 자신에게 꽂히는 수많은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와이번은 궁극의 기술인 헬 브레스를 쓰고 나면 온몸의 연료가 소진되어 가사 상태에 돌입하는데, 그 형태가 알 모양이라는 것을 어디선가 들은 적 있다는 설명이었다.
— 그렇군요… 이분들은 그럼 헬 브레스를 맞고도 이렇게… 멀쩡한 건가요? 혹시 이미 죽은 건…?
— 아닙니다… 이분 덕에 간신히 살았죠.
— 아직 이게 뭔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전 루나 라고 해요. 그리고 혹시 그 알을 건네주실 수 있나요?
텔라의 손에 들려있던 알은 루나에게 넘어갔다. 그러자 갑자기 루나의 눈에서 쉴새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일행은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힘겹게 말을 이어가는 루나를 당황하며 바라보았다.
— 이 와이번의 마음이… 저한테 전해져오고 있어요… 슬픔, 분노, 증오… 게다가 정말 어린 와이번이었네요…
— 어떻게 아는 거지?
— 모르겠어요… 알에 손이 닿자마자 바로 느낄 수 있었어요.
루덴은 이 말을 듣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흐린 하늘 아래 솔개 한 마리가 원을 그리며 날고 있었다.
**
루나를 제외한 일행은 모두 루나를 기다리며 그의 대저택 앞에 서있다. 대저택에서의 하룻밤은 너무나도 안락해서 어떤 고급 호텔에서 묵는 것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었다. 안젤리나는 두쫀쿠만 아니었어도 누누상점이 아니라 루나의 집에서 한동안 묵는 것을 요청하지 않았을까 상상했다.
— 하… 뭐가 이렇게 오래 걸린대? 엄마한테 거절당하고 집에 갇힌 거 아냐?
— 처음 뵀을 때, 그래 보이는 분은 아니셨어요. 게다가 처음 본 저희까지 묵게 해주셨잖아요.
— 그렇긴 하지만 자식 일은 또 모르는 일이니까… 어이, 너네 둘은 정말 우리랑 같이 가도 되는 거 맞지?
안젤리나는 살짝 거리를 두고 서있던 꺼누와 텔라에게 물었다.
이미 둘은 어제 와이번 일이 일단락 된 후 곧장 양옥으로 향했다. 와이번을 잡으러 간 대장과 텔라가 무사히 돌아온 것에 양옥 전체가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다. 그러나 이윽고 대장이 텔라와 함께 모험을 떠나기로 결심했다는 말을 하자 한창 고조됐던 분위기는 일순간에 정적에 빠졌다. 어떤 아이는 대장이 없으면 안 된다며 칭얼대며 소매를 붙잡았고, 어떤 아이는 가만히 서서 훌쩍거렸다. 이 모습을 본 꺼누 역시 자신의 판단이 잘못 되었다 생각하고 무르려던 찰나, 꺼누와 텔라 다음으로 양옥에서 나이가 많은 아이가 무리에서 나와 말했다. 애써 울음을 참느라 떨리는 목소리에는 그럼에도 그 속에 담긴 굳은 결심이 느껴졌다.
— 대장, 대장이 가는 건 슬퍼. 하지만 대장이 우리를 위해 오랫동안 고생한 걸 우리도 알아. 우리는 대장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모두들 그렇지? 대신 모험이 얼마나 오래 걸리든… 꼭 여기로 돌아와 주겠다고 약속해줘. 모험하면서 생긴 일들도 가끔 편지로 써서 보내주고… 아니 가끔은 아니고… 자주… 일주일에 두 번… 흐어어어엉
애써 말을 이어나가던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자, 양옥 전체가 온통 눈물바다가 되었다. 꺼누와 텔라가 아이들을 하나씩 안아주고 달래주고 나니 벌써 동이 터오고 있었다.
— 뭐… 잘은 모르겠지만 OK였던 것 같긴 해…
— 아침에 나올 때 꺼누 약간 울던데? 맞지?
— 아르르르르르 (콱)
— 아악 알겠어!!! 물지마!!!
— 여러분—————!!!
텔라와 초코가 또 소란을 피우는 중에 대저택의 문이 열리더니 환하게 웃으며 달려 나왔다. 여전히 긴 치마에, 한손에는 리라가 들려 있었고, 눈은 거의 뜨지도 못할 정도로 퉁퉁 불어 있었다. 엄마와 분명 한바탕을 했을 거라 모두가 짐작하며 헛웃음을 터뜨렸지만, 본인의 표정이 밝은 것을 보니 다행히 이쪽도 OK인 듯했다.
— 허락 받았어요. 같이 가도 된대요!
— 의외네… 대체 어떻게 설득 시켰길래…?
루나는 숲에서 있었던 일들을 전부 엄마한테 이야기했다. 태래가 이야기해준 내용까지 엄마한테 전달하자 예상 밖의 반응이 돌아왔다. 엄마는 차분히 이야기를 듣고는 긴 한숨을 내쉬더니, 엄마방 한 구석에 놓인 낡은 서랍을 열었다. 자기와 있을 때 엄마가 한 번도 여는 것을 본 적이 없던 서랍이 열리자 루나는 긴장하며 마른 침을 삼켰다.
서랍 안에서는 빛바랜 사진 하나가 나왔다. 엄마는 루나에게 조용히 사진을 건넸다. 바위산 꼭대기에서 찍은 어느 모험가 파티의 사진, 여덟명으로 구성된 파티원 중에서 맨 오른쪽에 리라를 들고 밝게 웃고 있는 한 음유시인이 루나의 눈에 들어왔다. 분명 엄마였다. 그 뒤로 엄마는 루나에게 아주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었다. 한때 엄마의 몸에도 봉인되어 있었던 음악의 고대신, 딸아이를 출산하면 그 아이에게 대물림되는 봉인, 한 몸에 두 영혼이 기거하는 탓에 이 불협화음이 루나에게까지 영향을 주게 된 것, 그 동안 자신이 숨겨온 모든 것을, 엄마는 자신의 딸에게 전부 이야기해주었다. 자신도 과거 한 파티의 음유시인으로서 모험을 했지만, 바위산길 다가치 근처에서 파티원 한 명이 행방불명이 되고 나서부터 내분이 일어나 파티가 와해되었다는 이야기까지도. 엄마는 세 딸들이 자신처럼 살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과거의 자신처럼 모험을 떠나겠다고 말하는 막내딸의 눈은… 이름을 닮아 보름달처럼 찬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입성 시험을 포기하고 모험을 떠나고자 하는 결심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소중한 막내딸의 운명을 어디로 데려갈지 엄마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무엇도 이 반짝이는 아이의 모험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은만은 분명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게, 아주 오래전 동료들을 따라 낯선 세계로 발을 들일 때 다졌던 결심을 떠올리며, 엄마는 한참 동안 말없이 루나를 안아 주었다.
**
— 헤헤, 아무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 루나는 그럼… 이 파티에서 어떤 포지션을 맡겨야 할까?
— 아이돌! 이렇게 귀여운 아이돌은 어느 파티에 들어가나 환영이죠—!
— 아이돌보다는… MP3… 같은 걸까나… 그런데 성능은 좀 안 좋은…
— 루덴씨 당신, 정말 숨쉬듯이 무례하네요…
— 하하하하하
일행들과 걸음을 옮기던 루나는 갑자기 무언가가 떠오른 것처럼 멈춰서 자신의 천가방 안을 들여다 보았다. 안에는 연두색의 알이 엄마가 만든 부드러운 조각보에 싸인 채 담겨 있었다. 루나는 알에 대고 나즈막이 속삭였다.
— 꼭, 집으로 데려다 줄게.
**
¹⁾ 심규선, <밤의 정원> 가사 중 일부